아마존에서의 소개

머리말

  이 책은 세계 여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수 많은 요청에 의해서 씌여졌다.
  캘리포니아 주 L.A에 있는 윌셔에벨 극장에서의 예수님의 기적의 치유와 그것들이 모든 인간들에게 의미하는 것에 대한 강연은 내가 지금껏 강연하였던 것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였다. 이 책의 의도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치유에 대한 내적인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예수님이 약 2천년 전에 하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치유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정신적, 신체적 질병에 대한 이야기는 태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당신은 성서에서 기술 된 많은 질병의 상태와 증상은 현재 어떤 지역 어떤 병원에서 거의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명명된 질병은 의학적 용어를 가지고 있는 병명이 있다.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교의를 가진 사람들은 지적, 정신적 법칙의 작용에 따르는 결과, 놀라운 처방적 결과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학, 정신병학, 심리학 그리고 관련된 다른 분야에서는 지적, 정신적 파괴로 인한 결과와 감정적 싸움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는 증거가 제시 되고 있다.
  성서는 모든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심리적 교과서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어려움에 빠지고 어떻게 그것에서 빠져 나오는 지를 설명한다. 성서는 삶의 과학을 가르친다.
  상징의 의미와 히브리어의 과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성서 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름의 의미에 대한 지식이 성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당신은 Strong's concordance Young's concordance 판의 성서에서 여러 가지 이름의 의미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책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책이 성서의 내적 의미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진다. 어떤 연설가나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들과 파장을 맞춰야 하고 그들의 사고, 언어, 감정들이 우리 마음에서 다시 재생되어야 한다.
  많은 복음서를 누가 썼는 가는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따라서 내가 이 놀라운 성서 이야기를 내가 이런 이야기 작가라면 내가 이것들을 쓸 때 나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때에는 나는 침묵하고 고요함을 유지한 채 나의 의식 안에 흐르고 있는 살아있는 지혜를 느끼면서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에게 드러내 줄 것을 느낀다.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다. 당신이 그것에 파장을 맞출 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우주적 마음이 당신 안의 주관적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과 마음의 내적 상호 통화의 상태에 의해서, 다른 마음과 당신이 파장을 맞추거나 조화를 이루어서 다른 마음의 모든 생각과 사고, 느낌을 당신의 마음으로 옮길 수 있다. 이것은 감각적 의사 소통의 기구 없이도 가능하다. 각자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하나의 마음이 있다. 이 책의 의도는 가능한 성서의 모든 이야기의 신비를 벗겨서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열려져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 엘리자, 바울 그리고 예수님이 사용했던 치유의 원리는 지금 당신에게도 이용 가능하다. 그것을 사용하라 그리고 빛 속으로 걸어가라 그림자가 사라지고 새벽이 올 때까지 영광에서 영광으로 전진하라.

1 장

정신병의 치유
  다음의 인용은 루가 복음 4장에서 가져왔다. 이것은 모든 치유의 근본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기에 있는 목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 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 하고 말씀하셨다.(Luke 4:18-21)
  이 말씀이 성서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비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 내일 또는 다음 주 또는 다음 해가 아니다. 바로 지금이다. 이 순간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당신의 이상, 이익 등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당신의 건강을 지금 요구하라. 당신의 평화는 지금 있다. 치유의 원리와 신의 평화가 당신 안에 있다.
  치유의 기적이란 주제의 나의 강연 중에 어떤 이가 성서에서의 치유의 이야기는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만약 치유원리의 이용이 항상 이루어지고 모든 곳에서 어느 시대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특정 날의 사건, 특정 지역, 어떤 특정 사람에게 한정된 것 보다 더 진실적이고, 더욱 흥미롭고 더욱 매혹적이다.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기도할 때 그들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심리적 드라마를 보아야한다.
  성서에 기록된 극적인 사건들을 자신안, 어둠 속에서 빛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의 이야기로 간주하라. 당신은 성서 안의 예수님을 1829년의 영국의 캠브리지의 로버트 태일러가 말했던 계몽된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호수아 와 예수님은 동일하다. 신의 지혜에 대한 믿음, 당신의 깨달음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잘못된 믿음, 이론, 사고를 거부하고 당신 마음의 사고, 믿음 그리고 견해를 보면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당신이 갈망하는 이상을 선언하면서 당신 자신을 예수님으로 간주하라. 당신은 이것을 지금 현재 할 수 있다. 성서 작가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금 현재 존재한다고 당신에게 말한다. 왜 몸이 완치되는 것을 기다리는가? 왜 연기(延期)하는가? 언젠가 나는 평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느님의 평화는 항상 당신 안에 있다. 하느님의 힘은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그 힘과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사랑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마음 속에서 솟아 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훌륭한 동료를 당신에게 오도록 할 수 있다. 당신이 미래에 찾고 있는 것, 원하고 있는 것은 지금 현재있다.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에 지금.
  당신의 마음의 법칙에 대한 지식이 당신의 구원자이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마다 그 가르침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때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가 들린 한 사람이 와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 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하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썩 나가거라"하고 꾸짖으셨다. 그러자 마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을 쓰러뜨리고 떠나 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다.(Luke 4:32-35)
  옛날에는 미친 사람은 마귀나 악마에 사로 잡혔다는 믿음이 있었다.
  성서의 시대에도 여러 형태의 귀신 쫓는 주술이 정신 이상자에게 실행되었다. 심지어 오늘날 미국의 어떤 지역, 심지어 여기 L.A에서도 "그는 악마에 사로 잡혔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오늘 날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그리고 정신적 지도자들은 인성조정과 마음속의 부정적 사고와 나쁜 믿음을 지우기 위해서 노력한다. 당신은 정신병 환자가 충격 요법에 의해서 치유가되는 기적적 변화를 자주 보았을 것이다.
  몇 해전 나는 배로 인도를 가던 중 사나운 정신병 환자가 어떤 미국 여성의 기도에 의해서 완전히 나은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호기심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했는 가를 물었다. "나는 신의 사랑과 평화가 그의 마음에 가득 차기를 기원했다고"그녀는 대답했다. 오늘날 나는 그녀가 의미하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정신 이상자 안의 신의 힘과 존재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그의 마음 속에서 되살아 났고 치유력이 뒤따라 왔다. 그녀의 믿음이 그를 완벽하게 했다. 이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완벽한 이야기이다.
  모든 악마, 마귀는 인간의 창조하는 능력을 무지와 부정적,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진 마음의 부정적 상태이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회당(마음)속으로 들어가 정신적 깨달음에 의해서 그의 마음에서 안 좋은 이론, 독선, 믿음, 견해, 또는 분노, 적의, 증오, 질투 등의 모든 부정적 상태를 제거할 수 있다. 강박 관념, 이중 인격, 그리고 모든 정신 일탈 상태는 습관적 부정적 사고의 결과이다. 이런 것들은 잠재 의식 속에서 콤플렉스, 여러 가지 형태의 독소로 마음 속에 남게된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과 결합하여 하나라는 인식에 의해서 모든 마귀를 쫓을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았다.
  마귀라고 가정된 것은 소리쳤다. 우리를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는 조용히 하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면서 꾸짖었다.꾸짖다의 의미는 당신이 부정적, 사악한 힘을 완전히 거절하라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순간에도 마귀가 어떤 힘을 가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실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자기 일을 입밖으로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Mark 1:34)
  이것의 의미는 빛이 비쳐진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대중적 사고가 당신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의 힘으로부터 당신을 떨어지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사용한 치유 방법은 권위의 말이였다.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Luke 4:36)
  당신의 말은 당신의 깨달음, 느낌, 확신이다.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하나로 결합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사실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지적으로 완전한 수용과 화합의 단계까지 당신은 도달할 수 있다. 당신이 유보없이 완전히 받아 들이면 그 순간부터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치유력은 일어난다. 만약 당신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성서에서 설명하는 가르침을 따라야한다. 당신의 회당으로 과감히 들어가라. 이것의 의미는 당신의 마음의 성을 의미하고 거기에서 당신이 생각을 함께 모으고 당신 마음 속에서 신의 진리를 말하고 또 거기에서 그 병자를 위해서 자유와 평화의 마음의 분위기를 느껴야한다.
  지금 예수님이 되어야한다. 당신이 병의 증상이나 마음 속에 있는 장애로 힘을 부여하지 않고 당신의 왕국으로 들어 갈 때 당신은 신앙과 확신으로 가득찬 사람이 된다. 당신 주위의 사람들의 의견을 완전히 거부하라. 당신은 무한한 지성이 당신 안에서 흐르고 있고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주도권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권위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미국의 위대한 치료자 큄비는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신체를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의 신적인 완전성을 명상했다.
그는 성서에서 기록된 많은 기적을 재생시켰다. 하느님에게 진실한 것은 그의 환자에게도 또한 진실이라는 큄비의 확신으로 환자와 대화를 했다. 그는 말로써 그들을 치유시켰다.
  증오, 분노, 복수,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 즉 사악한 영, 악령이 있다. 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은 악령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분위기나 감정은 영혼이 인간적인 단계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주관적 마음을 지배하는 법칙은 암시에 그것은 순응적이다 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에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에 심지어 오늘날의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는 마귀를 쫓는 주술이 어떤 이에게는 매우 효과적이다. 마귀는 성서나 성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듣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통상적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 졌다.
  마귀 쫓는 주술에서 말의 힘으로써 소위 마귀라고 불리우는 것이 빠져 나가고 환자는 편안하게 된다. 가끔 주술적 언어를 듣는 환자는 경련을 일으키고 그 주술은 더욱 행해진다.이런 모든 과정은 믿음의 하나이고 그런 믿음에 따라 그 주술의 효과는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최면상태에서 실험을 할 때 암시에 의해서 미친 사람처럼 또는 개처럼 행동한다.만약 최면이 끝난 후에도 일어나는 암시를 받으면 그는 최면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행동을 되풀이한다. 이것은 강제성이다. 그가 악령, 마귀에 사로 잡혔다고 암시받으면 그의 잠재의식은 그 암시대로 행동한다. 그 실험에서 그 암시는 제거되고 그것은 암시였다고 설명하면 그제야 그 정신적 일탈은 사라진다. 정신 분열증, 정신병. 억압, 편집증 모든 타입의 정신병은 암시에 의해서 보여줄 수 있다. 소위 마귀라고 불리우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마귀 쫓는 주술 행사는 그 행하는 자의 믿음에 따라 결과가 이루어 진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거나 편지를 통해서 말하길 그들은 항상 어떤 목소리를 듣고 이러한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일들을 말한다고 한다. 그들은 악령에 사로 잡혔다고 믿고 있다. 나도 목소리를 듣는 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투청력은 인간 마음의 능력이다. 그것은 당신의 객관적 마음이 주관적인 마음으로 부터의 통신을 받게되는 당신 안에 있는 지성의 능력이다.
  몇 주전 나를 한참동안 당황하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분명히 들었다. 이러한 음성은 이성적, 분열적인 본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끝없는 지성과 지혜와 하나인 나의 주관적인 자아에서부터 온다. 당신이 주관적 마음으로부터 어떤 아이디어, 해답을 바랄 때는 먼저 그 문제가 당신에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 으로써 당신의 감각에 그 해답이 나타날 것이다. 내부의 소리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이는 그것은 상상력으로 돌리고 어떤 이는 주관적인 환상으로 돌린다. 어떤 이는 자신의 주관적 마음으로부터 들은 이런 현상을 외부의 영(靈)으로 간주한다. 말할 필요 없이 암시의 법칙이 그들의 투청력의 상태의 특성을 나타낸다.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의 암시의 특성을 갖게 된다. 만약 당신이 천사가 당신을 인도한다고 믿으면 잠재의식은 그대로 따른다.
  당신의 잠재의식은 당신이 부여한 암시에 따라 천사의 특성이나 악마의 특성을 갖게 된다.
    몇 달 전 어떤 대학생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는 계속해서 영(靈)의 소리를 듣고 그것들은 자신에게 추잡한 일을하게 하고 자신을 혼자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고 성서나 다른 정신적인 책도 못 읽게 한다고 했다. 그는 초 자연적인 존재와 이야기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투청력(透聽力)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 기능은 모든 사람에게도 있는 것을 몰랐고 이런 것들을 악령(惡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현상은 그는 어떤 외적 영(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된 걱정에 의해서 그는 이 부분에서 편집광자가 되었다. 그의 잠재의식은 옳지 않은 암시에 의해서 지배당했고 점차 그의 객관적 기능은 점령당했고 그의 이성(理性)은 그의 권위를 상실했다. 그는 잘못된 믿음이 지배를 허용하는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당신은 깡패, 살인자, 암살자가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당신은 지혜와 신의 사랑이 당신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한다. 신에 대한 믿음과 모든 옳은 것으로 당신 마음을 채워야한다. 우리 각자의 주관적 또는 잠재의식의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부정적이나 긍정적으로 영향 받을 수 있다.
  그것을 긍정적, 건설적, 조화롭게 영향 받도록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잠재의식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옳거나 나쁜 암시에 순응적이다. 이와같은 설명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써주고 하루 3-4차례 10 -15 분 동안 되풀이해서 행하라고 했다.
  "하느님의 사랑, 진리 그리고 지혜가 나의 마음과 가슴에 가득 찬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듣고, 진리를 안다. 하느님의 평화의 강이 나의 마음에 가득 차고 나는 나의 자유에 대해서 감사한다."
    그는 이 기도문을 특히 잠자기 전에 천천히, 고요히, 성심성의 것 되풀이 해서 행했다. 조화, 평화와 동일시 함으로써 그는 사고의 틀과 마음의 상(像)의 재조정을 가져왔고 치유는 일어났다. 하느님에게 진실된 것은 그 자신에게도 진실된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는 기대, 반복 그리고 믿음에 의해서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위해 밤낮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존은 옳게 사고하고 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신적인 지혜와 지성을 표현한다.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느님의 완벽한 마음이다. 그는 하느님의 음성인 평화와 사랑을 듣고 있다. 그는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 하느님의 평화의 강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찬다. 그의 마음은 하느님의 지혜와 지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지금 그에게서 떠났고 나는 그가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것을 선언한다."
  나는 조화와 평화가 느낄 때 까지 이와같은 진리의 말을 밤낮으로 명상했고, 일주일 후 이 젊은이는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외부로 표출 된 안 좋은 현상과 공포적인 증상에 나의 주의를 주지 않았다. 나는 이런 병적 상태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내 자신을 먼저 고쳐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물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나의 설명은 이 젊은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병적인 상태를 계속 보는 한 그 질병 상태는 우리 안에서 계속 자리 잡고있다. 우리의 실패는 제자들 (우리의 지적 기능)에 대한 믿음의 부재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완벽성에 대해서 명상해야한다. 날이 밝고 어둠이 물러갈 때 까지. 그는 마귀가 말한다는 것을 겪지 않았다. 

2장

 
어떻게 당신 마음의 병을 고치는가?
예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시몬의 장모가 마침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셨다. 예수께서 그 부인 곁에 서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하시자 부인은 열이 내려 곧 일어서서 사람들을 시중들었다.(Luke 4:38-39)
  얼마 전에 어떤 여인이 자신의 아이가 고열이 있고 살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나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소량의 아스피린과 항생제를 조제할 뿐이였다. 이 여인은 이혼하려고 의도하고 있었고 따라서 심하게 흥분되어 있었고 감정적으로도 불안했다. 이런 불안한 느낌은 잠재의식적으로 그녀 아이에게 전해졌고 그 아이는 아프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들 부모의 지배하에 있고 그들 주위의 주도적인 지적 분위기에 의해서 조정된다. 그들은 그들 인생에 있어서 사고, 감정, 반응을 제어하는 이성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여인은 나의 제안에 따라 시편 23 장을 읽고 인도를 기원했고 또한 남편에게 분노와 노여움 대신에 사랑을 보냈고 그에게 평화와 조화를 기도함으로써 차분해질 수 있었다. 아이의 고열은 그녀의 억눌린 분노가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고 고열이나 마음의 흥분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차분한 마음을 유지한 채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하느님의 영(靈)은 내 아이의 생명이다. 영(靈)은 고열이 없고 아프지 않는다. 하느님의 평화가 내 아이의 몸과 마음에 가득 찬다. 하느님의 조화, 건강, 사랑 그리고 완전성이 지금 내 아이의 몸과 마음 속에서 형성된다. 내 아이는 편안하고 차분하고 고요하다. 나는 지금 내 아이 안에 있는 잠자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깨운다. 모든 것은 잘 되었다."
  그녀는 이와같은 기도를 10 분 동안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사랑스럽게 되풀이 했다. 그녀는 아이의 현저한 변화를 목격했다. 그 아이는 깨어나서 인형을 찾았고 먹을 것을 달라했다. 체온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녀는 더 이상 마음 속에서 흥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은 그 아이에게서 떠나갔다. 그녀의 평화, 조화 그리고 사랑은 즉시 그녀의 아이에 의해서 느껴졌고 상응하는 반응은 일어났다. 성서학적으로 말해서 그녀는 아이를 손으로 잡은 것이다. 여기서 손이란 하느님의 힘을 의미한다. 손을 가지고 당신은 만들고, 방향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창조적 힘의 지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아이를 손으로 높이 올렸다. 즉 그녀는 마음 속에서 건강, 조화, 평화의 사고를 수용의 지점까지 올림으로써 전능의 힘은 그에 맞게 응답했다. 당신 사고의 본질에 응답한 것이 깊은 마음의 속성이다. 그녀가 아이에 대해서 완벽한 건강에 대한 사고로 자신의 의식을 집중할 때 전능의 힘은 그녀의 의식의 초점으로 흘렀고 치유는 일어났다.
    성서에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간다, 라는 말은 당신이 듣는 것을 의미한다. 시몬은 듣는 것을 의미하고 시몬의 장모의 의미는 당신이 지금껏 외부로부터 들어 온 것과 그것들에게 의식을 집중하므로써 발생한 감정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뉴스에 의해서 혼란스럽고 극심히 흥분될 때 당신은 회당(마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원자를 적시는 내적 평화에 대해서 명상해야 한다. 그러면 내적 평화가 뒤따르고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 당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느님을 명상함으로써 병적 상태를 물리 쳐야한다.
  예수께서 어느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이 나병으로 문드러진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예수를 보자 땅에 엎드려 간청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 에게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예수께서는"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하고 이르셨다.(Luke 5:12-14)
  성서에서 인용한 나병 환자는 잘못된 사고에 의해서 진실한 원천인 생명과 떨어져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오감각(五感覺)에 지배 당하고 심리학적, 정신적으로 그의 신성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사람을 말한다. 나병 또는 좋지않은 상태는 공포와 미신 그리고 잘못된 사고와 함께 오감각(五感覺)에 의해서 지배 받은 결과이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당신은 손을 대고 기도하고 치유가 뒤따르는 것을 봤을 것이다. 이것이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가끔 사람들은 손을 대고 치유를 행한 자를 선천적 치유자라고 칭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선천적 치유자이다. 하느님의 치유의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사고에 의해서 그것에 접촉할 수 있다. 그것은 응답한다.
  치유의 원리는 개, 고양이, 나무, 새 에게도 있다.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고 모든 것의 생명이다. 신념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신념을 통해서 궤양을 고치고 어떤 이는 소위 불치병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치유했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치유력에게 있어서 크거나 작은 것은 없다. 어렵고 쉬운 것은 없다. 무한한 능력은 모든 사람 속에 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돌아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치유를 받았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피하게 하는 현명한 일이다. 당신의 친구들은 폄하하고 회의적인 말을 함으로써 당신의 믿음을 갉아 먹고, 당신이 기도로써 치유하는 자로부터 받은 그리고 당신의 지적 수용에 의해서 얻은 이익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사제에게 몸을 보인다.당신이 기도할 때 당신은 제물을 제공하는 사제이다. 당신의 느낌, 분위기, 또는 수용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다. 당신의 소망은 당신의 헌납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피해를 줬던 모든 이들에게 신의 축복, 평화, 사랑, 기쁨, 행복을 기원함으로써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다. 당신 마음속의 모든 불결한 것( 부정적 상상과 파괴적인 사고)을 다 제거함으로써 당신은 당신 이상과 같다 라는 것을 느낌으로써 당신의 선물(욕구, 소망)을 신에게 제공할 수 있다. 좋은 소식을 듣는 기쁨, 응답 받은 기도에 대한 기쁨에 집중하고 몰두함으로써 오래 묵은 상태는 소멸되어 지고 새롭게 태어난다.
  만약 당신의 신체가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증상을 머리 속에서 버리고 당신 안의 하느님의 치유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외부의 오감각은 지금 내부로 향해야 하고 건강과 조화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당신의 모든 주의는 건강과 평화에 두어야 한다. 전능의 창조적 힘은 의심을 하면 흐려지게 된다.
  당신은 당신에게 흐르는 영혼의 응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치유력은 당신의 모든 원자에 닿게되고 당신은 정신적으로 부유해진다. 항상 하느님과 대화하라. 모든 부분이 고양된 상태는 일어난다. 이 정신적 깨달음은 자신을 새롭게 만들고, 매일 매일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된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기도를 계속 함으로써 우리는 고양되고 활기가 분출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신체는 활기를 다시 찾고 재충전된다.
  알렉시스 캐를 박사는 그의 저서인 미지(未知)의 인간 ( Man the Unknown ) 에서는 기도에 의해서 초래된 놀라운 결과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는 암 종기가 그 눈 앞에서 어떤 자국만 남길 정도로 작게 줄어드는 것을 목격했고 또 상처가 몇 초만에 나았고 병의 증상이 몇 시간 후에 사라지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종기, 화상 등의 치유는 각자 안에 있는 치유력을 끌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느님 또는 무한한 지성이 유일한 치료자이며 유일한 존재이고 유일한 힘이다.
  우리가 내부에 존재하는 이것을 부르고 그것에 최고의 인식을 주고, 치유력이 우리의 마음과 신체에 가득 차기를 요구할 때 우리는 신체를 완전하게 하고 치유력이 우리 신체의 모든 원자에 침투하여 치유력을 받게된다.
  우리의 신체는 조화롭게 기능을 시작하고 신체의 원자, 분자의 형태는 다시 한번 우리 안에 계신 신성의 방식으로 개조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알게된다. 내 몸에 있는 하느님을 나는 볼 것이다.모세가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이 구절에서 모세란 트라우드가 지적한 대로 법칙 즉 당신의 깊은 마음에 작용하는 방식을 본 것이다. 당신이 사고의 틀을 높이고 당신의 이익을 요구할 때 당신의 깊은 마음(법칙)은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고의 틀 그리고 지적인 상에 따라 응답하고 치유는 뒤따르게 될것이다.
  법칙은 원한을 갖지 않는다. 전기의 법칙과 같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전기의 원칙에 순응해야한다. 그러면 결과는 뒤따를 것이다. 당신은 오랜 세월 동안 물을 만드는 원리를 잘못 사용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올바른 과정을 따르면 그 순간 당신은 물을 얻게된다.
  그때 사람들이 중풍들린 사람을 침상에 눕혀 가지고 와서 예수 앞에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병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 구멍을 내고 병자를 요에 눕힌 채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예수 앞에 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Luke 5:24)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거라(Luke 5:24)
  예수님은 일어나서 침상을 들어라 라고 말씀함으로써 중풍 환자를 용서했다.
그것은 진실 또는 하느님은 결코 비난하거나 판결하지 않는다. 완전성은 판결하지 않는다. 모든 판결, 판단은 그의 자식에게 주어진다.
  모든 사람은 무한한 존재의 자식이다. 당신의 마음은 영혼의 자식, 자손이다. 만약 당신이 판단, 결심을 하는데 실수를 하면 당신은 무의식으로 부터의 강제적 반응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그에 맞는 경험을 한다. 당신의 마음은 항상 당신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새로운 지적 상과 사랑스러운 사고의 틀을 당신 마음에 부여하면 그것은 그에따라 응답한다.
  이것은 영원히 당신을 용서한다. 이것을 사랑의 신 또는 신의 자비로 불리운다. 중풍 환자는 그의 죄가 없어질 때 비로소 치유를 받게된다. 그의 내부의 마음이 치유력과 접촉하고 치유력과 하나라는 의식이 되면 그는 전능(유일한 힘)의 힘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 외적 변화는 내적, 정신적 깨달음에 순응하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은 병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에 올랐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공포, 자책, 비탄 그리고 비난 등의 정신적 비난자를 의미한다. 그가 하느님의 진리 그리고 생명의 법칙은 결코 비난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그 자신을 용서했다. 모든 공포와 잘못된 믿음의 침대에 누워있는 대신에 전능의 힘의 접촉에 의해서 완벽한 건강과 완전성을 상상하며 그는 법칙 안에서 똑바로 일어서게 된다. 만약 당신이 기도에 대한 해답을 원할 때 당신은 지붕위로 올라가야 한다. 당신은 기어 올라가야 한다. 하나의 전능의 잠재력과 당신의 그것에 대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지붕위에 올라가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오를 수 있고 믿음과 훈련된 상상력의 날개로써 당신 문제 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다. 신앙은 하느님에게 당신의 모든 헌신과 충성을 바치고 오직 하나(하느님)를 바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은 자신안에 위대한 의사가 있고 그가 지금 당신을 고치고 있고 그 의사를 방해하고 도전하고 위협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공포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고 지속할 힘도 없는 사악한 그림자의 잡동사니에 불과한 것이다. 지붕위에 올라 지붕을 뜯고 중풍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리는 것은 하느님과 그 분의 성스러운 존재를 명상함으로써 당신은 고양되고 당신의 마음은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되고 완벽한 건강에 대한 확신이 자신 안의 깊은 곳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집의 지붕을 뜯으면 당신은 하늘 위의 태양, 달, 많은 별을 볼 수 있다. 세속적 사고가 당신의 치유를 방해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당신 마음의 지붕을 뜯고 치유의 빛이 들어오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하느님에게 보내고 그는 지금 성스러운 존재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그가 있어야 할 곳 빛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진실한 것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진실하다고 믿고 주장해야한다. 당신이 이것을 계속 할 경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 비탄, 고난의 침대에서 일어나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힘차게 걸을 것이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 가 가르치고 계셨는데 거기에 마침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한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그를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서라"하셨다. 그가 일어나 가운데로 나서자.(Luke 6:6-8)
  이렇게 물으시며 그들을 모두 둘러 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이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Luke 6:10)
  선척적으로 한 손이 없이 태어난 어린 아이가 기도에 의해서 손이 자라게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적이거나 초 자연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신체를 형성시키고, 만들었 던 창조의 힘이 우리의 손, 다리, 또는 눈도 자라나게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믿기 시작 해야한다. 결국 우리 신체의 기관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이 아이스 박스를 만들었다고 하자 만약 그것이 고장나거나 부서지면 당신은 그것을 다시 맞출 수 없단 말인가? 당신은 그것을 고치고 없어진 부분을 보충시킬 수 없단 말인가?
  예수께서 "손을 펴라"라는 부분을 당신은 자신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로 인식해야 한다. 당신 소망의 실현이 당신의 곤란(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으로부터 당신을 구해주는 것이 라는 것을 알 때 당신은 행동으로써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의 의식과 잠재 의식이 당신의 소망과 기도의 실현에 동의, 화합할 때 당신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고 또한 예수님과 같게된다. 거기에는 더 이상 논쟁, 불협화음은 없고 당신이 화합에 이르게되면 당신은 행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계몽된 이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잠재 의식에 있는 힘과 지혜를 의미한다.
  성서의 난해한 부분을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원리를 사람으로 의인화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 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당신은 타락자, 일탈자이다. (2 Cor 13: 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손은 힘, 방향, 효능을 상징한다. 손을 가지고 당신은 디자인하고 창조하고 무엇을 만든다. 전능의 손은 하느님의 창조의 힘이 어떤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의식이 그 쪽으로만 향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열등감, 죄의식, 패배감을 가질 때 그는 상징적으로 오그라든 손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힘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우리가 감춰진 힘을 풀어놓고 하느님의 사랑, 빛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통로가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손을 펴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손은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의 의미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균형 잡히고,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프고, 불행하고, 불 만족하고,비 능률적이다.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태도는 완전히 틀려있다. 게다가 그들의 성과는 조잡하고 별 볼일 없다. 내부에 있는 전능의 힘에 확신과 믿음을 가질 때 내부의 빛에 의해서 인도 받는 것을 알고 당신은 자신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당신은 하느님의 통로가 될 수 있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꿈, 야망, 계획, 의도는 그들 마음 속에서 위축되고 굳어져 있다. 그들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는 그들의 소망을 부정한다. 마음의 법칙과 어떻게 과학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알지 못 함으로 그들 마음 속에서 위대한 사고는 죽어가고 결과적으로 좌절과 노이로제를 초래할 뿐이다. 당신은 주위에서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많이 볼 것이다. 그들은 활기가 없고 문자 그대로 넝쿨 위에서 죽은 사람인 것이다. 생명은 진보적이고 성장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표현과 창조에는 한계가 없다. "만약 내가 죠의 두뇌와 그의 富, 그의 배경이 있다면 나는 성공하고 대단한 사람이 될텐데" 이러한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손(성취하고 발전하는 우리의 능력)은 오그라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자책한다.
  당신 마음에서 공포, 의심, 적의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 하느님을 완전히 믿고 항상 위험한 처지에 있을 때 감정과 겸손을 가지고 나는 나를 강하게하고, 인도하고, 위안하고, 가르쳐 주는 하느님의 힘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말하라. 당신 앞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보라. 당신의 평가와 개념을 높임으로써 당신의 손을 펴라. 목표를 높이 잡고 당신의 시야를 올리고 당신은 당신의 비전이 가는 데로 항상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당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상을 마음 속에 새김으로써 당신의 손을 펼 수 있다.
  당신의 소망을 실현 시킬 수 있다 라는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으로써 당신의 현실 속에서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잠시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신적인 불만족(하느님의 계속된 자신의 표현)이 당신을 다시 자극시키고 당신으로 하여금 더욱 높은 목표를 가지도록 그리고 계속해서 무한의 높은 곳까지 당신을 이끌 것이다.
  당신의 손을 펴라 라는 구절은 단순하고 놀라운 철학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의 손을 펴라.

3장

不在치료와 정신병의 치료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다. 백인 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인 대장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께 전갈을 보냈다." 주님, 수고스럽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하면 가고 또 저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군중을 돌아다 보시고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 가 보니 종이 이미 깨끗이 나아 있었다.(Luke 7:6-10)
  이것은 부재치료의 기술에 대하여 아름답고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치료하는 가에 대해서 자주 질문한다.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 또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요법을 부여할 때는 다른 이의 자유를 느끼고 알게 됨으로써 당신 마음 속으로 보고 듣는 것을 단순히 고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미국 군대가 어떻게 명령을 수행하는지를 안다. 병사는 그의 상관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되어 있다. 훈련을 거친 병사는 훈련 받은 상태가 된다. 그의 마음과 신체는 어떤 행동에 순응하게 된다. 장교는 권위 있는 자이다. 그는 명령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배워야한다. 또 그는 상관에게 복종해야 한다.
  당신이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할 때 당신은 훌륭한 병사가 되어야한다. 차렷 자세와 우로 봐 명령을 따르는 것을 배워야한다. 당신은 삶의 진실이나 정신적 가치에 주의를 줘야하고 다른 이(당신이 기도하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상태를 상상함으로써 당신은 우로 바 명령을 유지해야한다. 당신 사고, 느낌, 감정 그리고 능력을 훈련하기 시작해야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시작하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사고가 방황하고 다시 원 상태로 되돌아 오면 이렇게 말하라 "나는 건강, 평화 등( 당신이 집중하는 모든 것)에 나의 주의를 쏟는다 "
  당신의 사고, 아이디어, 분위기, 느낌이 당신의 하인이다. 그들은 당신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서 당신을 고귀하게 또는 비천하게 봉사한다. 만약 당신이 고용인이라면 고용인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이 복종하기를 기대하고 사업의 도구와 과정에 순응 하도록 돈을 지불한다. 같은 방식으로 당신은 당신의 사고를 명령한다. 당신은 주인이다. 노예가 아니다. 분노, 공포, 편견, 질투, 격노 등과 같은 깡패 같은 생각이 당신을 명령하고 당신을 가지고 놀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마음을 훈련시키려고 할 때 의심, 걱정 등 세상의 안 좋은 인상이 당신을 위협하고 겁주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감정을 건설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사고를 삶의 목표에 쏠리도록 명령함으로써 마음을 조정해야한다.
  당신은 완벽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감정을 볼 수 없다. 감정은 사고를 뒤 따른다. 그리고 당신이 사고와 지적인 상을 제어할 때 당신은 자신의 사고를 떠맡게 된다.
  어떤 사람, 어떤 것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고 방해할 수 없고,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그것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당신을 스컹크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신은 스컹크인가? 아니다. 다른 이의 암시나 언급은 당신의 사고를 통하지 않고는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감정적 힘은 오직 당신에게만 있다. 당신은 당신 마음의 움직임을 책임지고 있다. 당신은 분노, 증오, 복수 속으로 들어 갈 수도 있고 평화, 조화, 선의로도 또한 들어 갈 수 있다. 당신이 부정적인 반응으로 향하게 될 때 즉시 당신의 목표에 당신의 사고를 일치시켜라. 즉시 당신 사고를 당신의 이상으로 향하게하고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당신의 사고(당신의 하인)에게 가라고 하면 그들은 가고, 오라 하면 그들은 오게된다.
  당신의 상상력에게 결핍, 손해, 불행 등을 줄 수 있고 또한 성공, 건강, 번영을 줄 수 있다. 당신이 상상하고 사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발생하게 되어있다.
  당신의 상상력을 하느님의 일터로 만들어야 한다. 상상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예를 들어 언급하면 어떤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이 집에 좀 늦게 도착하면 아이가 어떤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왜곡되고 뒤틀린 마음 속에서 그녀의 아이가 병원에 있거나 어떤 사고를 그녀 상상 속에서 그린다. 그녀는 말을 보낼 수 있고 아이를 고칠 수 있고 그녀 자신도 고칠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 과학적으로 기도하고 명령을 따르는 훌륭한 병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기도할 때 당신은 성스러운 명령의 지배 안에 있게 된다.
  내부에 있는 하느님의 지혜에 따르는 당신의 사고, 관점, 전망 속에서 지적 자부심과 당신의 자아에 둘러 싸이게 된다. 지금 당신은 조화와 건강, 평화, 기쁨, 완전성 그리고 美를 가져오는 명령 밑에 있다. 당신은 당신의 빛을 세상에 비추기 위해 여기 존재한다. 당신은 전지전능하고 그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하는 끝없는 사랑에 믿음과 완벽한 신뢰를 두어야한다.
  지적이나 감정적으로 하느님과 하나라는 의식을 가져라.
  하느님의 모든 특성, 자질,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이고 하느님은 당신안에 조화, 건강, 평화, 기쁨 그리고 부유로 흐르는 통로라는 것을 느끼고 알아야한다.
  당신이 이러한 진리를 긍정하고 자주 되풀이 함으로써 이러한 기도를 습관화 함에 따라 당신의 마음이 영원한 진리로 점차 가득 차게되고, 미와 선 그리고 진실을 가져오는 신적 강제성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인 하느님의 명령이나 성스러운 명령 밑에 당신 자신을 두면 당신은 하느님이 의도하는 사람이 되고, 영원성을 품고 있는 사람의 완벽성이라는 명령을 따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임무를 뛴 하느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은 사람이 된다. 누구의 명령을 당신은 수행하고 있는가?
  위의 예를 봐서 그녀가 그녀 아이에 대해서 불길한 예감을 갖고 아이에게 이런 부정적 사고를 퍼 붓고 만약 그 일이 계속되었다면 어떤 재난의 연관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여인은 걱정, 두려움, 염려의 사고로부터 그녀의 명령을 받았다. 다른 말로해서 그녀의 마음에 있는 약탈자, 침략자들이 그녀를 위협하고 그녀로 하여금 신경쇠약을 걸리게했다. 당신의 가능성은 끝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당신은 손을 펴기 시작하라. 하느님은 당신을 조정하고 대화하는 조용한 동반자이다. 당신이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인생은 대단하고 만족스러워질 것입니다. 당신 자신은 알기 시작하라. 이 책의 각 장에 있는 진실한 기도의 힘을 시도해 보라
  자신을 하느님의 지혜에 맡기면 당신은 자신이 꿈꿔온 삶보다 더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일어나라 침상을 들고(새로운 지적 태도) 빛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걸어라.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 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주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 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Luke 7:12-15)
  이것은 놀라운 심리학적 드라마이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이루지 못한 당신의 욕구인 것이다. 당신이 되고 자 하는 것은 지금 요구하면 당신은 당신 안에 죽어 있는 자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그대로 당신에게 이루어 질 것이다. 믿음이란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죽은 남자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과부란 그녀 남편은 죽은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정신적, 감정적으로 하느님과 그의 진리와 결혼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로 평화, 기쁨, 건강, 행복 그리고 고무(鼓舞)라는 면에서 죽은 것이다. 과부란 오감각(五感覺)이나 세속적 믿음에 의해서 그의 남편인 하느님과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녀는 하느님, 내부의 창조적인 힘으로 향할 때 그녀의 자식, 즉 소망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게된다.
  외부의 오감각 문을 닫고 그녀가 되고자 하는 자신을 조용히 사랑스럽게 요구하고 느낌으로써 또한 진심으로 그녀의 신(내적 영혼)이 그녀의 요구를 존중하고 유효화 시키는 것을 알게된다. 지적으로 완전 수용의 분위기 안에 그녀는 살고 움직이고 그 안에 그녀의 본질이 있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계속하면 그녀는 내적 확신에 도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 안에 죽은 남자를 되 살릴 수 있다.
  그녀의 승리의 내적 감정은 죽은 자를 명령하는 신이다. '젊은이, 나는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것은 그녀의 외부로 표출한 주관적 실체이거나 응답 받은 기도의 기쁨인 것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서 적응시키고 동화시키는 것은 우리를 되 살린다.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말하기 시작하다 의 의미는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고 당신은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을 표현한다. 회복된 병자는 즐거운 건강의 말을 하고, 내부의 광휘를 발산한다. 우리가 내적 믿음을 발견하면 우리의 죽은 희망과 욕망은 말을한다.
  이러한 예를 든다면, 나는 아일랜드에 사는 내 먼 친척인 한 청년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는 혼수상태에 있었고 이틀 동안 콩팥은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 중 한 명과 동행해서 그를 병문안 갔다. 나는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그리고, 당신은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 지금 손을 뻗어 당신 몸 위에 얹어 놓으십니다."
  나는 이것을 조용히, 부드럽게 여러번 되풀이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있어서 내가 말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예수께서 여기에 오셨다. 나는 내가 치유되었는지 알고, 나는 살아날거야."
  무엇이 일어났나? 이 청년의 무의식은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는 나의 말을 받아 들였고 그의 잠재의식은 그가 전에 교회 안의 예수님의 형상과 그림으로 보았던 상(像)으로 그에게 나타나게 했다.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나타나서 그의 손을 뻗어서 자신을 만졌다고 믿었다. 이 책의 독자들은 최면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그에게 그의 할아버지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 그는 그 할아버지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라고 믿는 것을 볼 것이다. 그의 잠재의식은 그의 기억의 상(像)에 따라 그의 상(像)을 가져올 것이다. 심지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최면이 끝난 후에도, 당신은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최면을 걸 수 있고, 그는 정확히 그대로 할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환상(幻像)으로 불리어 지는 것이다. 나의 친척인 이 카톨릭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치유하러 왔다는 굳은 믿음에 의해서 불붙은 믿음이 그의 치유의 원동력이였다.
  우리의 믿음이나 지적확신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어있다. 잠재의식은 암시에 순응적이다. 심지어 무의식 상태에 있어도, 그의 깊은 마음은 말하는 자의 암시를 받을 수 있고, 그에 상응하게 행동한다. 이 이야기는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復活)한 실례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건강, 믿음, 확신, 그리고 활기의 부활이였다. 희망, 기쁨, 평화, 사랑, 그리고 신의 사랑을 우리 안에서 죽게해서는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인 것이다. 공포가 죽을 때는 믿음에 대한 자리가 생기고, 미움이 죽을 때는 사랑에 대한 자리가 생긴다. 무지가 죽을 때는 지혜에 대한 자리가 생긴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배를 젖기 시작하였다. 일행이 호수를 건너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 때 마침 뭍으로부터 호수로 사나운 바람이 내리 불어 배에 물이 들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께 가서 흔들어 깨우며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꾸짖으시자.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 졌다. (Luke 8:22-24)
  이것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조정하고 동요하는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 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배안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말해서 어딘가를 항상 여행하기 때문이다. 곤란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해답과 해결을 찾는다. 공포심이 들때는 우리는 신념으로 향해야한다. 그 여행은 항상 먼저 마음이 가고 신체는 마음이 가는 데로 따라 간다. 마음의 동의 또는 조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다. 의식이 유일한 힘이고 유일한 동기이다.
  사람의 의식은 영구히 움직인다. 심지어 잠잘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항상 활동적이다 .
  우리의 제자들은 우리가 갈 때 어느 곳이든지 같이 가는 지적 태도, 분위기, 지적 능력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 안에서 잠자게 해서는 안된다. 성서에서의 과학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예수님, 배, 바람, 파도, 그리고 제자들을 진실, 능력, 분위기, 인류의 사고를 의인화하는 것을 알아야한다.
  당신의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을 실현시키고 성취하고 완성시켜 주는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당신이 깨닫는 것이다.
  마음의 법칙에 대한 지식과 지적 정신적인 법칙의 사용이 어느 곳 어느 때나 당신의 해결책 이고 당신의 구원자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배 안에서 주무시게 해서는 안된다. 이 말의 의미는 대중적 마음, 즉 바람(사람들의 견해)과 파도(공포, 의심, 질투, 증오 등등)와 같이 어울려서는 안되는 것을 말한다. 호수는 당신의 마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마음이 평화로울 때는 하느님의 지혜, 생각이 당신의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마음은 안정과 균형 그리고 침착으로 가득찬 하느님의 평화의 강이 당신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풍랑은 때때로 인간을 사로잡고 그로 하여금 동요하고 머뭇거리고 걱정에 사로 잡혀 전율케하는 공포, 테러 그리고 고뇌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공포에 의해서 제어당하고 그가 앞으로 나아 가는 것을 방해 받는 것을 발견한다. 공포와 제약이 당신을 사로 잡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나? 당신의 소망을 보고 있을 때 당신은 마음 속에서 해결책과 구원자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아마 당신은 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르겠다."나는 돈을 벌 수 없어 더 이상은 일할 수 없어," 이럴 때는 당신 안에 솟아 오르는 혼란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감정 속으로 빠져들면 안된다. 당신의 구원자를 일으켜 세워라. 당신 안에서 잠자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자극하라. 당신이 실현 시키기를 원하는 소망, 욕망, 이상, 계획 그리고 의도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마음의 실체이고 당신 소망을 정신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소용돌이치고 시끄럽고, 거품이 이는 공포와 머뭇거림의 물 위를 건널 수 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느낌이고 당신의 깨달음은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생각이나 소망의 형태로 있는 마음의 실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 정도 실제적이다. 마음 속에 품은 그림은 실제적이라는 것을 믿어라. 이것의 실제성을 명상함으로써 당신은 물(공포와 의심) 위를 걸을 수 있고 공포와 파도를 조용히 하게 할 수 있다.
  당신의 이상으로 모든 주의를 집중할 때 하느님의 창조의 힘은 의식의 초점으로 흐르고, 당신의 공포는 줄어든다. 지금 당신은 파도를 진정시키고 있다. 당신의 마음을 훈련시키고 있다. 사고는 항상 실제적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있다.
  사고의 실현을 믿기 때문에 사고는 희망의 대응물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다. 전능의 힘이 항상 당신을 받쳐주고 돌봐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 두고(당신의 목표에 계속해서 당신의 시야를 그곳에 맞추어라) 당신의 목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라. 이것은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주관적 마음은 당신의 건설적 사고와 느낌에 응답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활력과 파워는 당신에게 부여된다. 공포의 파도,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들은 가라앉는다. 위를 보라. 당신의 비전이 가는 곳으로 당신은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훈련된 마음, 믿음, 확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삶의 모든 물 위를 걷게 할 수 있고, 푸른 목초지와 고요의 물로 가게 할 수 있다. 당신은 바람과 파도를 명령할 수 있고 그들은 복종할것이다.
  예수께서 뭍에 오르셨을 때에 그 동네에서 나온 마귀들린 사람 하나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옷을 걸치지 않고 집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 질렀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더러운 악령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여러번 악령에게 붙잡혀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인채 감시를 받았으나 번번이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뛰쳐 나가곤 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많은 마귀가 들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처 넣지는 말아 달라고 예수께 애원하였다. 마침 그 곳 산 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Luke 8:27-35)
  이 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떤 정신병 환자를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정신적 일탈이고 파괴성과 싸움으로 특성화 된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무덤 사이에서 사는 사람으로 묘사된 미친 사람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비석은 죽은 자의 기록이고 여기서 그 의미는 죽은 과거 속에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즉, 과거 원한을 계속해서 키워서 자신의 마음 속에 강박관념으로 만드는 과거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미친 사람은 비탄, 증오, 복수 또는 자기 동정이 자신을 분열하고 이성적인 마음을 이들이 차지하도록 허용한 자이다.
  파괴적이고 부정적 감정들이 우리를 조정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감정은 사고를 뒤따른다. 그리고 우리 사고의 삶을 재조정함으로써 우리의 감정적 삶을 조정할 수 있다. 인간은 감정을 보이게 할 수 없다. 그는 마음 속에 어떤 상이나 사건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생시킴으로써 감정을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정신병을 옳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려고 노력한다. 예수께서 미친 사람에게 묻기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하자 그는 말하길 "군대입니다." 많은 마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악한 존재가 어둠 속에서 있다가 그를 사로 잡는다고 말하는 어떤 뉴욕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어디에서 그런 미신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믿음에 잡혀 있는 그는 모든 종류의 트러블을 불러 일으켰다. 잘못 된 암시에 의해서 지배당한 그의 주관적 마음은 그의 이성의 기능의 조정력을 대신 차지했고 그의 이성은 사임되었다. 그는 이런 잘못된 믿음의 결과를 경험해야만 했다. 이 잘못된 주관적 믿음은 그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되었다. 그는 영(靈)의 목소리라고 스스로 가정한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이야기 를 거는 줄은 모르는 채, 초 자연적 존재와 대화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했다.
  그의 잠재의식은 그가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는 靈에 대한 믿음과 잘못된 암시의 두려움에 순응하여 단순히 행동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다른 특성을 가진 잠재의식의 이름은 군대이다.
  이 사람은 교회의 의식 절차에 의해서 그를 괴롭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목사를 찾아 갔다. 이런 주술의 과정은 아마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선언과 주문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귀신을 쫓는 의식에서의 기도와 의식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 신념과 확신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교회와 성직자의 힘에 매우 수용적이기 때문에 그가 소위 부르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
  이 의식에서의 모든 과정은 단순히 믿음이였다. 이것이 이 환자에서 근본적인 지적 태도의 변화가 일어났고 치유를 발생하게 하였다. 이것은 물론 맹목적 믿음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혀 없는 것 보다 확실히 낫다. 성자의 뼈, 성수, 마법사의 주문이 사람의 깊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신념과 수용성을 가져오는 심리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하느님의 치유력 또는 정신적인 치유력은 의식과 잠재의식의 조화로운 기능이라고 언급된다. 우리의 마음은 그 안의 의식과 잠재의식 안에 우리의 소망, 개성, 경향, 태어날 때부터 있는 충동이 있다. 사고와 교육,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태도와 여러 종류의 습관을 습득하게 된다. 인간은 습관의 소산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모든 부정적 사고와 견해를 거부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과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나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억압된 충동과 성향은 출구와 표출을 찾는다. 이러한 파괴적인 감정은 내적 갈등을 일으키고 만약 이런 것을 해소되지 않으면 정신적 분열이 일어나고 마음 속에서 무질서가 일어난다. 우리 안에 있는 주관적 자아는 항상 우리 안에서 균형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공포, 긴장, 갈등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자연 또는 신적 자아는 문제의 모든 의식을 잃게된다. 이것이 정신병인 것이다.
  이런 마음은 고통을 주는 긴장과 스트레스로부터 떨어져있다. 우리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실패할 때 불균형이 일어난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과 지혜 없이 우리의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서는 안된다. 정신일탈은 너무 커서 견딜 수 없는 깊고 억압된 감정과 갈등의 단순한 표현이다. 콤플렉스는 표현되기를 원하는 감정들의 집합이다. 만약 증오와 편견으로 가득차면 그는 무덤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밖으로 끌어 내어져야 되고 이성의 빛이 비춰져야한다. 그러면 그들은 사라진다. 성서의 언어에 의하면 당신이 증오,편견 그리고 질투라는 마귀를 버리면 당신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독소적 콤플렉스는 항상 무덤 안에서 숨는다.(잠재의식)
인간이 그의 편견, 짜증, 원한을 이성의 빛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거부할 때 이러한 감정들은 각자 개성의 상태를 표현하는 의식 세계에서 그 밑으로 내려 앉는다. 그리고 공포, 무지(無智),등 여러 가지 정신적 강박관념에 묶이게 된다.
  우리가 원한, 편견, 복수 그리고 한탄의 감정을 키울 때 그들은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고 조만간 터지기를 기다리는 불꽃과 같다. 만약 우리가 이런 타오르는 화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지혜롭게 다루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고 정상의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의 감정적인 면이 추진력이다.
  당신이 병원에 있는 정신병자에 대해서 기도하기를 요청 받을 때는 당신은 그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 그는 이성과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의 마음의 어두운 곳을 걷고 있는 잠재의식의 귀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모든 것은 당신 혼자서 해야한다. 당신은 그의 자유, 평화, 조화에 대해서 스스로 확신해야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 2-3차례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존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의 지혜, 지성, 평화는 그 안에서 실현되고 그는 자유롭고 빛나고 행복하다. 그의 마음은 새로운 옷을 입는다. 하느님의 마음은 유일한 실체이며 영원한 마음이다. 이것이 그의 마음이고 그는 균형 잡혀있고 고요하고 침착하고 긴장은 풀리고 편안하다. 그는 하느님, 생명, 온갖 선한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고 나는 그가 지금 완벽하고 완전하는 것을 선언하고 느끼고 지금 보고 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되풀이 함에 따라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신은 점차 당신 마음 속에서 상상의 그림을 자주 그림으로써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곧 치유된다는 주도적인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위의 보기에 따라 모든 치유는 기도로써 타인(他人)을 치유하려는 자의 마음 속에서 이미 이루어져야한다. 그는 단 한 순간에도 어떤 증상이나 병의 진단으로 어떤 힘을 주어서는 절대 안된다.그는 영원히 그의 믿음에 응답하는 생명의 원칙의 작용에 의존해야 하고, 그것을 믿어야한다.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당신은 시간, 공간, 외부환경, 조건, 세속적인 견해를 초월해야한다. 당신은 옳은 판결을 정하게된다. 이것의 의미는 내적 인간( 정신적이고 신적인 존재)은 아프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고,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것도 지혜, 평화, 조화, 지성 또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내부의 인간은 이런 특성과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완벽한 평화에 대해서 명상함으로써 하느님의 평화의 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의 잘못된 사고와 복잡한 견해를 다 해소하게 된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전능의 힘을 지금 인식해야한다.
  기도 중에는 모든 갈등을 버려라, 그러면 외부의 코팅( 내부의 작품을 가리고 있는)은 사라지고 걸작품은 원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귀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돼지 떼는 호수로 달려 들어가 빠지고 질식해 죽었다. 여기서 돼지는 헤엄칠 때 스스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심리적으로 생명의 물 속에서 헤엄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부정적 사고와 혼란(마귀들)은 믿음의 부족 때문에 죽는다. 당신이 더 이상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때 과거는 죽게된다. 당신이 성취할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과거를 돌아보고 있고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메시지를 듣지 말라.
  이상이나 욕구가 당신에게 말하길 "일어나라 전진하라 그리고 성취하라"고 한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의 복도를 걷고 있는 구원자이다. 이 이상을 지금 실제인 것처럼 받아 들이고 당신이 그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걸어라. 지금 당신은 마음 속에서 새 옷을 입어라, 그러면 평화의 파도가 당신에게 밀려오게 된다. 당신은 당신이 찾는 것을 이미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성서는 말한다. 당신의 시야를 높이 세워라. 들판을 보라, 그것들은 추수할 수 있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다.
  그 때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의 열두살 쯤 된 외 딸이 거의 죽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집으로 가실 때 군중이 그를 에워 싸고 떼 밀려 쫓아갔다. 그들 중에는 열 두해 동안이나 하열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가산마저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 병을 고쳐 주지 못했다. 그 여자가 뒤로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 순간에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베드로도 "선생님, 군중이 이렇게 에워싸고 마구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에게서 힘이 뼏쳐 나갔다. 누군가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떨면서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며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며 병이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저 선생님께 수고를 더 끼쳐 드리지 마십시요."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하라. 그러면 딸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 집에 이르러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아무도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죽었다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울지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붙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거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아이는 숨을 다시 쉬고 벌떡 일어났다.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Luke 8:41-55)
  이 모든 이야기는 심리적이고 그에 맞게 번역해야한다. 당신은 마음 속의 사고를 다루는 야이로인 것이다. 예수님의 발 밑으로 당신을 던져라. 이것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힘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당신은 죽어가는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다.
  죽어가는 딸은 당신 마음 속에 있는 열망과 야망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야이로, 딸, 하열병을 앓고있는 여인, 야고보, 요한- 모든 이러한 개성은 각자 우리들 안에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딸(소망)은 죽어간다. 우리가 그것을 소생시키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도 임신할 수도 없다. 피를 흘리고 있는 자궁은 신체적 기능을 할 수 없다. 여인은 감정, 느낌을 의미한다. 우리의 감정이 훈련되지 않고 야성적이면 우리는 상징적으로 피 흘리는 자궁인 것이다. 공포, 걱정, 의심 때문에 에너지와 활기는 허비된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자궁(마음)은 안에서 닫혀져야 한다. 당신이 내부로 가서 모든 객관적인 증거에 대한 당신의 감각의 문을 닫고, 당신이 원하는 모습을 마음에 품으면 당신의 자궁(마음)을 닫는 것이고 당신의 이상이나 계획을 성취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당신의 사고는 창조적이다. 당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창조의 힘은 응답하고 새로운 지적 초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태도를 유지하면 당신은 당신의 아이를 되살릴 수 있다.
  당신 마음 깊이 아이는 죽지 않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 라는 것을 당신은 알게된다. 당신의 믿음, 당신의 마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자궁을 닫게한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하였다. 믿음은 오직 하나의 힘이 있고 그것은 전능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통해서 온다. 우리가 이 하나의 힘에 대한 진리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줄 때 우리는 그것을 듣는다고 말해진다. 사랑, 믿음, 선의의 힘에 대한 진리를 듣도록하자. 그리고 우리의 주관적 지혜가 어떤 문제라도 해결책을 드러내 준다고 믿어야한다. 믿음이란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귀나 주의(注意)를 거짓말, 거짓 미신, 모든 종류의 잘못된 개념에 둔다. 우리가 이와같은 일을 할 때 혼란이 주도하게 된다. 누군가 나를 만졌다. 나에게서 힘이 빠져 나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믿음, 사랑, 기쁨, 평화와 접촉할 수 있다. 당신이 지적으로 완벽한 건강의 사고를 가질 때 치유의 존재는 응답하고 당신은 완전해진다. 이것이 당신 자신의 깊은 부분에서 나온 힘인 것이다.
  그들은 그를 비웃었다 라는 구절을 보자. 당신의 오감각이 당신을 비웃고 조롱하지 않는가? 그들은 당신에게 도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해결 불가능하다." 또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왜 당신이 당신의 감각을 일시 정지시켜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새로운 지적인 상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사랑의 분위기로써 이 욕구를 발전시키면 당신은 그것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그 집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했다 의 의미이다.
  당신 스스로 사용하는 "나는"이란 것이 모든 아이디어, 욕망, 개념 그리고 충동의 원천이다. 베드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고 야고보는 옳게 판단하고 오직 좋은 소식만을 듣는 것을 의미하고 요한은 당신의 이상으로써 사랑이나 회개를 의미한다.
  우리의 감각으로써 알 수 없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3가지 특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이성과 감각이 의심하고 비웃고 조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내부로 들어가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이라고 느끼면 전능의 힘(잠재의식)은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고 비록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실현을 보여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써 외부와 밀봉되고 우리의 믿음에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장

당신의 치유력
  그때 웬 사람이 군중 속에서 큰 소리로 "선생님, 제 아들을 좀 보아 주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그 아이는 악령이 덮치기만 하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온 몸에 상처를 입습니다만 악령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 했습니다."하며 소리쳤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 하셨다. 그 아이가 예수께 오는 도중에도 악령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발작을 일으켜 놓았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악령을 꾸짖어 아이의 병을 고쳐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 마지 않았다. (Luke 9:38-43)
  마가복음, 마태복음에서도 오늘날 간질이라고 불리는 질병을 말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보면 그 당시에는 마귀에 사로 잡힌 것이 보통 믿음이었다. 그 소년은 입에 거품을 물고 뒹굴고 경련을 일으킨다. 성서에서는 간질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 언어는 그리스어 경련을 일으키는 병이라는 의미에서 왔다. 그리스에서는 간질이 성스러운 병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달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신이상(lunatic)란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을 알고 있다. 과거에 달의 상징은 잠재의식을 의미한다. 태양은 밝은 지성이나 지혜로 가득 찬 의식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잠재의식 속에 독주머니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경련과 간질 발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태양은 낮에 비추지 않고 달은 밤에 비추지 않을 것이다.(시편 121:6) 현대 정신과의사나 심리학자들은 지적, 육체적 일탈은 잠재의식, 무의식이라고 불리우는 마음의 깊은 부분에 뿌리가 있다고 명확히 보여준다.
  부정적인 잠재의식의 틀을 어둠의 병마라고 불리운다. 내부에 계신 하느님에게로 향하고 하느님의 선의와 힘에 의지하면 우리는 우리 삶 속으로 하느님의 행동을 불러 올 수 있다. 하느님의 자질에 우리 자질을 일치시키고 우리를 압도하는 힘을 가진 마귀를 인정하는 것을 완벽히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 헌신,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 유일한 힘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완벽한 조화와 그의 의지인 완벽한 평화를 원할 수 있다. B.C 4세기경의 히포크라테스는 당시 하늘이 내린 병이라는 간질을 그는 미신이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병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병은 정화와 그 당시에는 모호한 여러 가지 주문에 의해서 고쳐졌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연구에 의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정신일탈 원인에 대한 놀라운 지식이 있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 문제의 아이가 저능아 이거나 귀머거리이고 벙어리 또는 간질병 환자이든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 하느님과 함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런 종류의 병을 기도와 단식으로써 고쳤다고 말한다. 여기서 단식이란 외부감각, 증상 그리고 대중적 믿음으로부터 단식을 말한다. 우리는 단식해야한다. 해로운 외부적 징표를 정신적으로 거부해야한다. 치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질병, 정신병이든 정신박약이든간에 이런 병을 먼저 자신부터 고쳐야했다. 그러면 필요한 결과는 뒤따른다. 믿음으로써 기도하면 결과는 온다. 질병의 상태를 계속 보는 한 우리는 정신일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정신병이나 정신박약의 아이를 치유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의 부재 때문이였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아픈 사람을 꽉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것으로부터 자신을 먼저 치유해야한다. 진리에 대해서 아직 눈뜨지 못한 그 행위자는 그 상태(질병)이 실제로 그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실패할 경우 병자가 필요한 건강의 실체에 우리의 마음의 눈을 맞추는 것을 실패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 아픈 소년을 고칠 수 없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마음 속에는 어떤 질병은 치유하기 어렵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마음 깊이 믿고 있다. 그들이 정신병 환자와 그 증상을 볼 때 그들의 감각은 이런 곤란에 깊이 인상을 받는다. 여기서 제자들은 우리 스스로의 태도, 지적기능 그리고 관점을 말한다.
  외부의 징표로부터 우리 자신을 완전히 떨어지게하고 증상이나 외부의 상태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주지 않음으로써 전능의 잠재력인 치유의 존재와 스스로 일치해야한다. 하느님의 걸작은 외부가 아니고 내부에 있다고 간주할 때 힘, 믿음, 확신 그리고 의식의 고양(高揚) 이 일어난다. 정신병이라는 지적 무질서를 다룰 때는 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사용한다.
  나는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그 환자의 이름을 말하면서 지적으로 무한한 평화와 조화 하느님의 지성, 사랑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 3-4분 명상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한다. 동시에 하느님에게 진실한 것은 내가 기도하는 자에게도 진실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기도하는 자의 마음 속에 질서, 조화, 축복, 평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평화, 건강, 조화의 지적 분위기와 느낌을 끌어낸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을 그만두고 그 사람의 완전성을 선언한다.나는 이것을 하루 2-3번 되풀이 하던가 내가 더 하고자 하는 느낌이 들때는 더 자주 한다. 나는 이전에 기도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항상 되풀이하여 기도한다. 비록 부분적인 실현을 얻더라고 문제의 그 사람은 많이 호전된다. 중요하는 것은 계속하는 것이다. 당신 마음 속에 새 날이 오고 어둠이 물러갈 때까지.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주요한 의도는 내부의 기쁨과 하느님이 편히 휴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 것이다. 기도 중에는 우리는 천국으로 가야한다. 그 의미는 내부의 평화와 휴식의 상태이다. 우리가 이 천국에 자주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거기에 십 팔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혀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고 가까이 불러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 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였던 사람들에게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하고 말하였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서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십 팔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하셨다.
(Luke 13:10-16)
  손을 얹어서 치유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행해져왔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놀라운 치유를 나는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는 그들은 치유력을 지닌 손을 부여 받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고 믿으면, 그들의 믿음대로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 문제의 진실은 우리 모두는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수에게만 부여하는 특권이 아니다. 치유력은 당신 안에서 하루 24시간 계속 작용하고 있다. 당신이 어릴 때 겪었던 모든 상처, 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봤나. 무한한 지성이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혈액을 응고시키고, 상처를 봉합시킨다. 그리고 당신에게 새로운 세포를 준다. 따라서 완벽한 치유가 발생한다. 당신이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일어난다. 내부의 지성은 끊임없이 당신의 신체를 새롭게 하고 있다. 믿음은 이 치유력을 빠르게 만들고 당신은 즉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된다.
  사실상 모든 종파의 많은 교회에서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행한다. 성서에서 나온 여인이 안식일 날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관점에서의 안식일에 행해지는 많은 일, 못을 박고,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은 죄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점에 대해서 극단으로가서, 심지어 안식일 날 돈도 만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다.
안식일은 내적고요, 내적태도인 것이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인간이 언제 어느 곳이나 모든 것에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되새기게 된다.
  당신 마음속 깊이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당신은 안식일 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명상하고 기도할 때 당신이 내적평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성공하면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마음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타오르고 하느님의 응답을 확신하면 당신은 안식일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순간 하느님의 에너지, 힘, 활기 그리고 생명을 느끼게 된다. 외부의 행동- 의식적, 절차적 그리고 교회나 어떤 기관에서 행한 의식, 규칙, 율법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종교나 진정한 예배는 아니다. 교회의 모든 규범과 가르침을 준수하더라도 동시에 그의 마음 속에서는 하느님의 모든 법칙을 어길 수도 있다. 그가 매주 교회에 가도 신앙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내적변화,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변화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정신적 가치와 사랑에 빠지게 될 때 당신의 모든 공포, 적, 병마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평화, 건강, 행복의 의식상태에 있을 때 당신은 하루 종일 안식일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잠재의식 속에 신적인 인상과 당신의 이상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실체와 객관적인 실현 사이에는 항상 그 간격의 시간이 있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의 내적인 태도와 침착이 안식일인 것이다. 여기서 언급 된 회당장은 세상에 널리 퍼진 관점이나 견해나 지배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회당은 사고, 느낌, 분위기와 견해를 모아 주는 집합체를 말한다. 예수님을 항상 효력있게 할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이 소망을 바라보았을 때 당신은 실제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거나 해결책과 구원의 길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픈 여인은 나약의 의미, 의식의 억압상태, 어떤 몸이 굽혀진 병에 대한 주관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여인은 감정의 속성, 삶의 주관적인 면을 의미한다. 우리의 질병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채워진 부정적 사고의 틀을 나타낸다. 여기서 회당장은 두려움, 의심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의 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논거가 당신 마음 속에 오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 속에 다툼이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물음으로써 그런 위선적 사고를 없애야한다.
  그것은 배후에 어떤 원칙은 있는가? 그것들은 마음의 그림자가 아니란 말인가? 두려운 마음은 두터운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주의를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라. 그러면 그들은 무관심 때문에 죽을 것이다. 하느님의 전능의 힘이 있는 잔치에 참여하고 그것을 받아들여라. 지금 당신은 치유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것을 필요하면 여러번 되풀이하라 그러면 안식일이나 완전한 수락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일어서고 걷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안식일인 것이다.

5장

불치의 병들이 치유되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입을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자의 손을 붙잡으시고 고쳐서 돌려 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자기 당나귀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여 당장 구해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못 하였다.(Luke 14:1-6)
    바리사이파는 어디에나 있다. 그는 외적행동과 규칙의 준수에 중요성을 둔다. 그는 법칙의 문자에 집착하고 사랑과 성서의 말씀 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부족하다. 바리사이파는 선풍기가 그의 목을 뻣뻣하게 할 수 있고 병균이 감기의 원인이고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독감의 원이이라고 믿는다.
    날씨, 조건, 환경들은 오직 주관적인 방식으로만 영향을 준다. 인간은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선풍기가 그에게 감기를 가져다 줄 수 없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서 사실로 받아 들이는 사고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선풍기 앞에 있으면서도 감기나 목이 뻣뻣하는 것을 겪지 않는다. 만약 최면적 암시를 받아 들이면 그는 그런 설계에 따라 감기에 걸린다. 감기는 그 자신의 생각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암시를 거부하거나 받아 들일 수 있는 힘이 있다. 만약 받아 들인다면, 그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결과는 나타난다. 그는 자기 자신외에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잘못된 생각을 받아 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언급한 성서 이야기에서 병은 부정적 사고의 홍수 때문이다. 마음이 긴장, 스트레스로 가득 차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는 신체 안에서 만들어지고 배출기관을 파괴시킨다. 만약 증오와 마음 깊이 분개를 가지고 있으면 또한 그것들을 억제시키지 못 했을 경우 이러한 정신적인 독소의 파괴적 효과 때문에 그의 신체기관이 붕괴되는 것을 가져온다.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들은 인간의 지적태도나 의식의 상태가 밖으로 그려진 것이다. 나는 매우 신앙심이 돈독하고 어떤 악의나 분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런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버지가 水腫症으로 죽고 그것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인생 줄곳 같은 것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을까하고 두려워 했다고 한다.의사가 그의 아버지 배에서 많은 양의 물을 뽑아 내는 것을 봤다고 한다. 결코 중화되지 않았던 이런 계속 이어지는 공포는 의심할 것 없이 그의 수종증의 원인인 것이다. 그는 큄비 박사 가 100년에 설명한 '어떤 것을 믿으면 당신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든 안 하든 간에 그것은 나타날 것이다.'라는 단순한 심리학적 진리를 몰랐다. 이 사람의 공포는 그의 아버지를 괴롭혔던 그 병의 희생물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되었다.
이 설명이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 들였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공포는 진리의 왜곡이고 공포는 힘이 없다 왜냐하면 불협화음 배후에는 원리는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강의 원리는 있고 질병의 원리는 없다. 부유의 원리는 있고 빈곤의 원리는 없다. 정직의 원리는 있고 기만의 원리는 없다. 수학의 원리는 있고 오류(誤謬)의 원리는 없다. 아름다움의 원리는 있고 추함의 원리는 없다. 그의 믿음이 그를 조정하는 유일한 힘이였다. 인간의 마음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선과 악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 사람은 그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보았고 거짓을 버렸다.
  치유력이 그를 만들었고 여전히 그와 함께 있고 그의 질병은 사고의 무질서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마음을 하느님의 규범에 순응하도록 재조정했다. 밤에 잠자기 전에 그는 각각의 단어의 뜻을 느끼면서 아래와 같이 단언했다. "지금 치유의 존재가 하느님의 본성과 지혜에 따라서 나의 신체의 모든 과정을 개조시키고, 치유하고, 회복하고, 조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이와같이 확신을 가지고 휴식을 취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행동인 것을 나는 안다. 다른 힘은 없고 이 치유의 힘은 지금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 기도를 매일 밤 30일 동안 되풀이 했다. 그의 마음은 건강에 대한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안식일인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서 완벽한 실행의 순간을 의미한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하느님의 치유에 관해서 훌륭한 강연을 하는 목사가 집행하는 예배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목사의 교회의 위원회 중 하나가 예배가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해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치료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과학문명에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은 그의 인생 동안 수 많은 자연치유를 경험한다. 생명은 우리의 상처, 골절을 영원히 치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약 오염된 음식을 먹었을 때는 이 생명의 원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음식을 토하게하고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나는 어떤 크리스찬 사이언스 신자를 알고 있는데 그는 실수로 독극물을 마신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명한 의사였고 하느님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그때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부터 수 백 마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힘에 의지해야 만 했다. 그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하느님은 그의 성스러운 사원에 계시고 그는 나의 실체인 모든 세포와 기관 속에 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는 오직 질서, 美, 그리고 완벽한 기능만이 있다." "하느님이 그 자신과 같지 않은 모든 것들을 중화시킨다." 그는 이것을 한 시간 동안 계속했고 비록 매우 아픈 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그는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독극물을 먹은 사람이 그의 주관적인 힘을 믿음으로써 해로운 결과를 없애게 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을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응급상황이거나 실수로 초래된 상황에서 진리를 믿는 사람이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성 마크가 말했듯이 "만약 그들이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시더라도 그것은 그들을 해치지 못하고 그는 전혀 상하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인 독이 많이 있다. 율법교사 그리고 바리샤인은 우리 안에 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법칙과 견해를 말하고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業은 우리를 따라 다니고 즉 전생의 업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리샤파 적인 생각들은 우리 마음 속에서 떠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하느님에게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우리가 아픈 것은 이것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다. 순교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은 " 하느님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 이것은 시험이다. 나는 나의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 들여야한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의지는 생명의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자신을 건강, 조화, 기쁨, 완전체, 완벽함 그리고 부유로써 표현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지는 하느님의 본성인 즉 끝없는 사랑, 무한한 지성, 완벽한 조화, 완벽한 평화, 무한한 기쁨, 끝없는 지혜 그리고 완벽한 질서, 균형이다. 생명은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평화는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기쁨은 슬픔을 원하지 않는다. 조화는 불협화음을 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벌을 내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때문이라고 탓하는 것들 즉 그런 불행이 그들의 부모님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善이나 완벽성은 의미가 없다. 많은 질병은 잘못된 믿음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경향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당신을 시험하거나 벌을 내린다고 믿으면 마음의 법칙에 따라 곤란, 반대, 병마 등 여러 종류의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이 왜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항상 징크스가 따라 다니는가 하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만약 잘못된 전제를 가지면 그의 경험이나 결말은 그의 잘못된 전제에 따르게 되어 있다. 실제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벌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슬픔이나 기쁨, 고통이나 평화이든 간에.
  당신에게 있어 예수님은 의식과 잠재의식을 통합하고 조화롭게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마음의 법칙을 알고 그것을 건설적으로 적용하고, 죽어 있는 소망을 일으켜 세우고, 의식없는 사고를 깨우고 당신의 이상을 향하여 힘차게 걷는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인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앞을 못 보고 머뭇거리고 움추려들고 절뚝거리지 않는다. 이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나는 이장에서 어떻게 그가 유사한 질병을 스스로 낫게 했는가에 대한 개요를 말했다. 이 치유력은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2천년 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에든 존재한다. 당신은 그것을 붙잡을 수 있고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기적이라는 것은 불가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이것은 현재도 과거 그리고 미래에도 항상 가능하다는 것들의 확증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는 시작도 끝도 없다. 조화는 항상 존재하고 생명의 원리는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어떤 천사나 성인이 당신을 치유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라. 하느님이 당신을 치유해줄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아프고 시무룩하고 증오하고, 빈곤하면 당신은 당신 마음과 실체에 씌어 있는 하느님의 법칙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라. 지적인 독소는 의식 안에서 마치 오염된 냇물 같이 비밀리 활동하고 심지어 몇 년 후에 병, 손실, 불행 등의 안 좋은 경험으로 나타나는 나쁜 사고들인 것이다.
  치유에 대한 첫 번째 단계는 지금 이 순간부터 현재의 병의 상태에 대해서 공포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재 질병의 상태는 과거 사고의 소산이고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을 유지하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잠재의식 안에 계신 하느님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나 당신의 환자 안의 모든 독소에 의해 생성된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현재의 질병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킴으로써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을 상상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이상의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소망 속에서 살아라 그리고 언어(당신의 사고나 느낌)은 곧 형태를 띄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이의 믿음(정신적인 독소)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허용하면 당신은 감정적으로 당신의 具象 속에서 살 수 없다.
  가장 치명적인 독소는 증오이다. 이것은 무지와 자기연민이고 실제로 편집증인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심리적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희망과 믿음의 활력에 독소를 넣고 정신 분열증, 우울증 등 여러 형태의 정신 일탈을 가져온다.
  정신적 해독제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신성 즉 하느님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하느님과 정신적으로 도취되는 것이다. 당신 마음에 정신적인 가치로 가득 채우고 사고는 형태로써 나타나게 된다는 새로운 지식과 미치도록 사랑에 빠짐으로써 당신의 모든 삶을 개조할 수 있고 건강, 행복, 사랑 그리고 기쁨을 끌어 들일 수 있다.
  당신은 생명의 원칙은 당신의 정신적인 틀에 따라 흐르고 형상은 심상과 유사성에 따라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사랑에 빠지고 열광할 수 있다.
  인력의 법칙이 영원히 당신 인생에서 작용하는 것을 깨달을 때 모든 것에 대해서 기적 같은 열광에 사로잡히게 된다. 당신은 지금 하느님과 모든 선한 것, 기쁘게하는 것, 자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당신은 지혜를 간절히 원하고 목말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원히 존재하는 오직 한 분의 빛 속으로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노령은 또 다른 정신적 독소이다. 성경에서는 나이를 세월의 흐름으로 보지 않고 지혜에 대해서 눈 뜨는 것으로 보았다. 당신의 모든 독소를 깨끗하게 없애주는 신적인 열광을 구하라, 다니엘 같이 비록 사자 우리 안에 있어도 당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 즉 신적인 보호망을 높여라.

6 장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한 치유력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가시게 되었다. 어떤 마음에 들어 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 와 그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Luke 17:11-19)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사건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이다. 만약 당신이 4개의 복음서 중에 병자가 치유되는 이야기를 제거하면 복음서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버리는 것이다.
  이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는 신체의 병은 그것의 원천은 영혼의 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미국 의학협회의 초대의장인 엘미헤스 박사는 얼마 전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의사는 병실에서 할 일이 없다. 라고 말하는 기사를 읽은 것을 기억한다.
  대부분의 의사 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완벽한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할 거라고 믿는다. 이 시점에서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면 "의사는 환자를 다루고 하느님이 환자를 치료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성서에서 나온 나병환자의 의미는 싸우는 욕구, 감정 그리고 혼란한 생각을 말한다. 그것은 마음이 병든 자는 그의 사고와 감정, 신체가 병든 사람을 의미한다. 나병은 소모성 질병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활기, 에너지, 열정, 인생의 활력을 잃은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질투, 시기, 분노, 혐오, 자책(自責) 등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나병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이를 지나가게 되셨다. 의 의미는 기도의 과정이나 기도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 속의 거리를 항상 걸으면서 당신으로 하여금 전진하고 향상하라는 손짓을 하는 이상, 소망, 계획, 의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상, 꿈, 비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에게 "일어나서 나를 잡으셔요."라고 말한다. 당신의 소망을 수용의 지점의 의식 상태까지 끌어 올릴 때 당신은 성서에서 말하는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는 진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의 소망은 혼란과 분열된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사마리아와 갈릴리(당신의 마음)에서의 싸움을 가로질러 가야한다. 여기서 10의 의미는 각각의 과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단순한 방식으로 보아라. 숫자 1의 의미는 당신의 사고나 소망으로 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0이나 원은 자궁이나 수용적인 마음을 상징한다. 여기서 여인은 남성의 발생 장소를 의미한다.
  10의 의미는 당신 마음의 음, 양의 결합, 사고와 느낌, 사고와 감정, 두뇌와 가슴을 말한다. 이런 두가지가 조화롭고 건설적으로 기능할 때 이것은 행복한 결론이나 결합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잘 융합되고, 건강하고, 활기있고, 용기있는 사람이다.
  사고는 느낌과 결합해야한다. 우리의 사고는 사도 바울이 말하듯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요. (phil 4:8)라는 정신적 기준에 순응시켜야한다. 옳은 감정은 옳은 사고를 뒤따른다. 진심이나 주관적인 느낌은 하느님의 성배, 즉 하느님의 성스러운 성지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성서에서는 성배로 불리운다. 우리가 생명의 정신적인 가치에 대해서 명상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개조시키는 혈관을 통해 흐르는 사랑, 믿음, 확신 그리고 에너지의 주입을 가지게 된다. 우리 자신 속의 전능을 움직이게 하는 믿음에 의해서 모든 것은 이루어 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믿음은 불붙듯 커지게 된다. 오직 하느님의 힘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무엇을 생각할 때 그 순간 전능의 힘이 의식의 초점을 통해서 마치 핀의 끝 부분처럼 집중되어서 흐르는 것이다.
  프랑스 심리학자 보드랑이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은 인생에서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그 자체를 즉시 수행하기 시작하는 우리의 사고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한다. 즉 우리의 소망이 완전히 자신의 주관화될 때 우리는 성취와 이행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평화(예루살렘)의 장소에 있다.
  우리의 믿음은 이제 분열되지 않고 소망과 믿음은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은 잘 되었다.
  10이라는 숫자는 성스러운 숫자이고 선(善)을 의미하는 1과 원을 의미하는 0이 있고 이것은 마음에 분열이 있을 때 십자형(+)을 만든다. 인간이 2개의 마음의 상태를 가질 때 분열과 좌절이 뒤따른다. 그는 2개의 힘을 가지고 있고 善과 惡을 믿는다.
  그는 그의 환경, 상황, 조건을 보면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희망이 없고 모든 것을 잃었다. 이 딜레마에 빠져 나올 길은 없다. 나는 불치병 환자이다." 등과 같은 말을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힘을 외부에 돌린다. 아마 그는 날씨, 타인(他人) 또는 그의 고난에 대한 징크스를 비난할 것이다. 소망과 공포가 싸울 때는 마음과 신체는 전쟁터가 되고 결과적으로 에너지 소비, 신체 기관의 쇠약, 신경쇠약과 기진맥진이 된다. 창조물이나 외부세계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한다. 그는 창조자 보다 창조물을 높여서는 안된다. 그는 큄비 박사님 같이 그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유일한 존재이며 힘이신 하느님 즉 위대한 심판대 앞으로 그의 문제를 놓음으로써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 자신의 마음의 비밀의 방 안에서 그 내부의 영혼에 최고의 인정을 주어야한다. 그는 마음에서 공포와 부정적인 사고와 명령을 몰아내고, 그것들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것들 배후에는 어떤 원칙은 없고 그것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안다.
  오직 하나의 창조의 힘이 있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지금 이것이 그의 사고의 틀을 따라 흐르면서 그가 구하고 있는 것을 가져 온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한다.
  그는 치유가 일어날 때 까지 이것을 규칙적이고 조직적으로 계속해야한다. 그는 마음 속에서 선언된 판결이나 결심에 도달한다. 그는 죄를 일으키는(부정적 사고)를 비난하고 그 안에 갇혀진 죄인(소망)을 해방시켜 하느님(그의 주관적 자아)의 팔 안으로 인도한다.
  거기서 반복, 믿음, 그리고 기대를 함으로써 그의 소망이 그의 잠재의식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깊이 요법이나 성서에서 언급하듯 확신의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지점(예루-도시 살렘-평화)에 들어가는 것으로 불리운다.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는 이젠 제거 되어진다. 우리가 죽음의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그것이 처음 죽은 곳에 묻혀지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나오게 된다. 말(사고)은 살( 우리의 신체와 외적으로 표현됨)이 되었다.
  10명의 나병환자의 울음은 모든 사람의 울음인 것이다. 이것은 고통받고 좌절하고 정신분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직 내부 정신적 힘만이 평화와 정신, 신체, 감정의 건강을 줄 수 있다는 호소인 것이다. 그들은 크게 외쳤다.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내부의 정신적 존재에게 경배, 숭배, 충성을 할 때 당신은 자신을 지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선생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100번째 시편에서는 그의 자비는 계속되고 있다 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 말은 심금을 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입술로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사제란 말은 정신적 지각의 상징이고 하느님의 위대한 진리의 직관적인 인식인 것이다. 사제란 神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그의 최고의 주위를 하느님과 그의 법칙에 주기 위해서 잘못된 神들과 터무니없는 독소의 연회와 두려움, 미신, 테러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대중적 마음과 멀리 떨어지면 그는 하느님의 사제인 것이다.
  그는 그의 부정적 사고, 공포, 잘못된 믿음을 버리고 사랑, 평화, 美, 완벽성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야한다. 분개에 대해서 단식하고 사랑의 연회를 열고 빈곤의 사고에 대해서 단식하고 하느님의 富에 대해서 연회를 베풀어라. 또 슬픔에 대해서 단식하고, 하느님의 기쁨은 그의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 기쁨의 정수를 발산하라.
  진정한 사제는 고통에 대해서는 단식하고 하느님의 평화의 강에 대해서 연회를 베푼다. 그는 자기비난, 비탄, 자기연민에 대해서는 단식하고 순응성, 사회성, 친절, 선의, 미소에 대해서 연회를 베푼다. 그는 병의 증상에 대해서는 단식하고 건강과 행복의 지적 이미지에 연회를 베푼다. 그는 어둠에 대해서는 단식하고 하느님의 빛(지성)이 해결책을 알고 있고 그의 문제를 비추는 하느님의 빛에 대해서 연회를 베푼다. 그는 전생의 業, 운명, 숙명에 대해서는 단식하고 완전 무결한 것은 비난, 심판, 벌을 주지 않고 병, 죽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영원히 지금 현재인 하느님에게로 연회를 베푼다.
  비록 그의 손이 다른 사람들의 피로 흠뻑 젖고 용렬한 범죄를 지었더라도 그 자신을 하느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높이고 그는 지금 하느님이 의도하는 자 즉 행복하고, 즐겁고, 평화롭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느끼고 요구함으로써 내부에 계신 하느님에게로 즉시 향할 수 있다. 이 사람이 마음 속 깊이 어떤 像이나 비전을 그림으로써 그는 내부의 변화를 갈망하게 되고 하느님의 법칙이 자동적으로 그의 새로운 정신적 틀에 응답하고 과거는 잊혀지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이가 20년 동안 화학이나 전기의 법칙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그가 그 법칙을 제대로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자동적으로 응답한다.
  법칙은 원한을 갖지 않고 복수심도 없다. 우리의 마음을 다룰 때 우리는 또한 마음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살인자이거나 도둑, 또한 어떤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신 마음 속에 자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개념 그리고 당신이 긍정하는 것의 진리를 느낌으로써 당신의 삶을 바꾸려고 진정으로 결심하는 순간 법칙은 예전의 행동을 뒤바꾸고 당신 마음의 새로운 청사진에 맞게 응답한다.
  성의 없는 기도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오직 마음 속에 진실성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정신적 관점만이 당신의 모든 고통의 원인인 과거의 부정적 사고의 틀을 당신 마음으로부터 추방시킬 수 있다. 법칙은 편애하지 않고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의 법칙은 결코 우리를 벌주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와 믿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법칙의 반응만을 경험할 뿐이다.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는 세상의 천박한 사람에 대해서 분개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적의, 분노, 시기(猜忌)에 대한 근본은 없다. 모든 인간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내부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에 대한 이 요구를 긍정적으로 단언하면 마음의 법칙은 그들의 정신적 수용에 응답한다. 우리를 속이고 사기치는 사람에 대해서 악의의 감정을 품을 원리는 없다. 우리 마음 속에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무한한 마음 속에 모든 것이 존재하고 우리 자신을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재정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부의 창고로부터 당시 채워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상실이란 없는 것이다. 상실감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강탈하고 사기치고 속이는 사람들은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그들은 우리 의식상태를 증명한다.
  그들은 우리가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우리 인생의 책, 즉 잠재의식 속에 우리가 썼던 각본을 이행하는 우리 마음의 도구일 뿐인 것을 알 때 어떻게 우리는 그들에게 분노하고 적의를 가질 것인가? 우리가 분개하는 사람이 아마 낚시질, 댄스, 등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동안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고를 품으로써 우리 자신을 해치게 되었던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용서해야한다.
  어떤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제에게 너의 몸을 보여라.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사제, 즉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버리는 사제인 것이다.
  신체와 증상으로부터 당신의 주의를 떼고 내부의 하느님의 생명과 함께 머물음으로써 완벽한 치유에 대한 당신의 갈망인 당신의 제물을 지금 제공할 수 있다. 무한한 치유의 존재가 당신 신체의 원자에 흠뻑 젖고 당신을 완전하고 정화시키고 완벽하게 하는 것을 요구하라. 살아있는 지성, 즉 당신을 만든 것이 당신을 떠맡고 신체의 모든 기관을 하느님의 영원한 틀인 조화, 건강, 평화에 순응하는 것을 느끼고 알라.
  당신이 조화, 건강, 평화의 지적 분위기 속으로 들어 감으로써 당신의 사고의 틀의 재조정이 일어나고 자동적으로 인식의 새로운 상태에 순응하기 위한 신체의 구조가 변화한다. 당신의 기도에 의해서 해방된 치유력의 정신적 주입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 당신은 개조 되었다. 따라서 당신의 모든 원자는 영원한 神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10명이 치유되지 않았더냐 그러나 9명은 어디에 있느냐? 9라는 숫자는 소유의 의식을 말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의 느낌으로 들어가거나 우리가 단언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느끼고 요구를 계속할 때 우리는 사고와 사고, 분위기와 분위기를 더함으로써 결국 의식의 실행의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10 또는 우리의 이익, 善이 이루어진 단계이다. 의식의 순환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시작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하느님(유일한 존재)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것은 하나, 그것은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매 시간 하느님을 찬양하면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는다. 당신의 사고와 느낌이 열정과 사랑에 의해서 융합될 때 그것은 하나가 된다.
  당신 마음 속의 이방인은 병마, 공포, 걱정 또는 곤란한 문제점 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들은 하느님의 집에서 떨어진 이방인들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지 도둑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된다. 두려움, 걱정, 그리고 분노는 이방인이고 마음의 평화를 빼앗는 침입자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은 굶주리게되고 우리의 모든 주의와 헌신을 하느님과 그의 특성과 특질에 바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 한사람이 그가 치유되었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서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그의 발 밑에 꿇어 앉았다. 이것은 기도의 완벽한 공식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할 지도 모른다.
  즉 행복한 결혼, 번영된 사업을 갖고 훌륭한 친구를 가지더라도 당신은 심장이 나쁘거나 눈이 나쁜 상태를 가질 수도 있다. 우리의 최근 강연 Book of Job에 참가했던 어떤 남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잃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 9개의 조화롭고 안정적인 상태를 버렸다고 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 없이 작업에 임했고 그 누구를 칭찬한 적도 없고 그의 모든 축복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가 그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과 그가 즐기는 많은 축복을 알았을 때 그는 매우 놀랐다고 했다. 그 안에 있는 이방인은 눈병이였다. 감사의 분위기의 마음은 우리에게 우주의 창조의 힘과 파장을 맞추게했고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가 보내는 것은 몇배로 커져서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이 젊은 남자는 그의 마음을 고요히하고 안에 있는 왕들 중의 왕, 신들 중의 신에게 대화를 했다.물론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모습인가 하는 像은 없었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써 하느님이 저기 계시고 자신의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이 말을 부드럽게, 조용히, 온화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계속했다. 그는 매일 밤 졸리는 상태에서 이와 같은 것을 명상했다. 그는 감사의 분위기 속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는 눈을 완벽하게 치유하게 되었다.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라는 구절에서 얼굴은 하느님의 존재와 진리를 의미한다. 발은 이해를 말한다. 엎드리다 라는 의미는 무한한 지성과 힘이 자신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신의 지성은 옆으로 제쳐 놓고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라는 의미이다.
  비전은 정신적이고 영원하고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가 해야할 일은 선물은 이미 받았다 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기도가 응답 받았다고 믿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다.
  당신은 가끔 당신이 돈을 지불한 코트, 옷을 포장하고 있는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아직 그 물건을 받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신은 그가 그 물건을 당신에게 보내게 될 것이라고 당신은 그를 완전히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에게 이미 부여된 선물에 대해서 감사 드릴 수 있다. 수용의 지점까지 일어서라 그리고 선물은 이미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라. 낯선 곳에서는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Ex. 2:22) 우리 모두는 방황하고 순례하는 이방인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떠나갔고 여기서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성지 순례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 격려, 이상 그리고 鼓舞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세상사를 바라 볼 때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의 근원과 우리에게 그 곳으로 돌아가게하는 충동의 속삼임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이 찾고, 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은 우리 내부에 계시고 그것은 창조의 힘이고,창조의 존재라는 것이다.
  善과 좋은 자질, 면목, 상황 그리고 당신 인생에 있어서 조건들에서 떠나고 당신을 괴롭히는 것, 즉 이방인을 발견하라. 그것은 지금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욕구는 이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부의 하느님으로 향하고 당신의 마음을 고요히하고 주의(注意)를 산만히 움직이게 하지 말고 당신의 정신적 초점을 당신 내부의 영혼인 하느님에게 맞추어라. 그리고 조용히 감사합니다. 라고 당신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찰 때까지 자장가처럼 되풀이 말하라. 당신의 의식을 올바른 틀에 맞게할 때 응답은 올것이다.
  나병환자는 지금 치유되었다. 당신의 기도가 "오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 더 주셨습니다."라고 되게 해야한다.

7장

시력이 회복되다.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 오라고 하셨다. 소경이 가까이 오자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Luke 18:35-43)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고 Bire부인의 경우도 이와같은 경우이다. 그녀는 앞을 못 봤고 시신경이 위축되어서 쓸모없게 되었다. 그녀는 로데스를 방문했고 거기서 기적같은 치유를 얻었다.신교도인 이 젊은 부인이 루스 크래스톤 로데스에서 일어난 치유에 관해서, 맥콜 잡지 1955년 10월호에서 Bire부인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로데스에서 그녀는 시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시신경은 여전히 쓸모 없고, 생명이 없었다. 이것은 여러명의 의사에게서 수 차례 검사에 의해서 확인되었다.그러나, 1달 후 재검사 결과 그녀 시신경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학적 검사에만 의하면 죽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도 로데스를 1955년에 방문했고 나 역시 어떤 치유를 목격했다. 물론 의심할 것 없이 세계 각지의 성지에서는 치유가 일어난다, 기독교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 언급하고 있는 바이어 부인은 성수나 성지에 의해서 치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믿음 때문이다. 그녀 안에 있는 치유의 원리는 그녀의 사고에 응답했던 것이다. 믿음은 마음 속의 생각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사실이다 라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접수된 사고는 그 자체를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믿음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이미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바이어 부인은 그녀의 깊은 마음은 그녀의 믿음에 응답했고 정신적 힘은 해방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시력은 그녀의 믿음에 따라 회복되었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그대로 당신에게 일어나리라.
  눈을 만들었던 치유의 존재는 죽은 신경에 다시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가 만들었던 것을 그 원리가 다시 그대로 만들 수 있다.
  치유는 다양한 종교의식에서 가끔 뜻밖으로 일어난다. 어떤 이는 일요일 아침에 행하는 우리의 치유의 의식에서 그들의 몸은 나았다고 나에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치유를 기대하지 않았고, 그들은 회의적이고, 고양의 상태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치유에 대해서 생각도 안 했다고 덧 붙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믿음이 부족했고 그러므로 어떤 의심이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어떻게 그들은 치유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대답은 단순하다. 그들은 치유를 찾았고 그들의 마음은 개방적이고 참석한 대중의 기도를 받는 것에 그들의 마음은 수용적이였다. 아마 그들은 의사, 정골요법 의사, 척추교정 지압사에게서 치료를 받으러 갈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치유받기 원하는 욕구를 가르킨다.
  욕구는 기도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도인, 완벽한 건강으로 재생되는 기도에 매우 수용적이 된다. 기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치유되고 완전하고 완벽해지기를 단언하고 그들은 그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 연결고리가 형성되고 비록 그 중에서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에게도 치유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치유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혐오, 적의, 분개로 가득 찬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어떤 성지나 어떤 교회의 치유의 의식에서 치유를 얻을 수 있을까?
  만약 주입구나 호스 안에 잡탕의 파편으로 가득 차면 물은 자유로이 흐르지 못 할 것이고 게다가 물은 흙탕물이 되고 오염될 것이다.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해서는 호스 안의 꼬임을 제거해야 한다. 당신의 신체는 정원이고 당신이 기도할 때 하느님의 치유력의 물을 당신의 정원에 뿌리는 것이다. 치유의 물은 사랑, 평화, 기쁨, 믿음, 선의, 확신과 힘이다.
  혐오,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사랑과 기쁨의 물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는 원한, 짜증을 버리도록 결심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의 빛을 안으로 주입해야 한다.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방해물은 치유의 원리에 저항하고 작고 미세한 신체의 순환을 일으키게 한다. 방해물을 치우면 사랑과 영광이 들어오게 된다. 그의 정신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그의 치유를 연기(延期)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잠재력이 큰 치유력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의사. 사제, 랍비, 신 사상의 목사는 최고의 결과를 얻을 것이다.
  장님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자 그는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요." 이 장님 거지는 그가 원하고 말하는 것을 아는 분명한 사람이였다. 생명은 항상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당신의 소망은 무엇인가? 라고 당신에게 질문한다. 많은 사람들은 장님인 것이다. 그들은 심리적 정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가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개하고, 시기할 때 그는 정신적인 장님인 것이다. 그를 파괴하는 정신적 독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없고 현재 상황은 희망이 없다고 한다. 이와같은 태도는 정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 하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는 무한한 지성이 있고 그것은 그의 사고에 반응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새로운 인식을 가질 때 인간은 정신적, 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보기를 원한다고 외치면, 남자,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볼 수 있다.
  그들은 학교에서, 대학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생명의 창조의 원리가 어디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를 또한 의식과 잠재의식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배워야한다.
  에머슨 은 '인간이란 그가 하루종일 생각하는 그 자체이다.' 라고 말했다. 성서에서 말하길, 이는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 (잠언 23: 7) 라고 했다.
  인간의 생명의 원리는 그들의 무한한 지성이 그들의 사고에 반응하고 그들을 인도하고 이끌도록 요구하면 그들에게 길은 열려지고 자동적으로 옳은 일을 하도록 인도되어 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이런 진리를 몰랐지만 지금은 건강, 富, 그리고 행복, 마음의 평화를 보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길 자 눈을 떠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세주나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의 기대나 믿음에 항상 응답하는 생명의 치유의 원리를 상징한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느낌, 지각, 당신이 기도하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는 내적확신인 것이다.
  비전은 영원하고, 정신적이고 파괴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력을 만들 수 없고 그것을 해방시킬 뿐이다. 최근 초기 녹내장을 앓고 있는 부인이 찾아왔다. 그 병에 의해서 안구가 점차 굳혀졌다. 나는 얼마 전에 병원에 있는 녹내장 환자의 20에서 25퍼센트 가량은 그 환자의 증오심 때문에 유발한다고 하는 어떤 큰 병원의 안과 의사가 말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부정적이거나 파괴적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감염되기 쉬운 부분에 따라 허파, 심장, 간 등 다른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
  질병은 또한 공포나 대중적 마음 때문에 기인된다.
  이 여인은 그녀가 매우 싫어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녀는 이와같은 방식으로 했다. " 나는 그녀를 하느님에게 해방시킨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하느님의 행복, 평화 그리고 기쁨을 기원한다. " 그녀는 이 기도를 그녀 마음 속에서 며느리에 대해서 미움이 사라질 때 까지 계속 되풀이 했다. 몇 주후에는 실제로 그녀는 며느리에 대해서 선의의 생각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그와 다른 것들을 어떻게 없애는 가를 보여준다.
  우린는 가끔 다 같이 기도를 한다. 즉 우리는 서로 일치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상황을 보내고 또한 받는다. 그녀는 진리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수용적 태도를 가졌고 나의 다른 책에서 있는, 눈에 대한 기도에 대하여 있는 것을 이용해서 기도를 드렸다.
  "나의 눈은 하느님의 눈이고 나는 완벽하게 본다. 나의 눈을 만든 생명의 지성이 지금 나의 눈과 신체의 기능을 조절하고 있다. 나의 시력은 정신적이고, 영원이고, 파괴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만약, 그러므로 그대의 눈이 하나로 일치하면, 그대의 모든 신체의 부분은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나는 오직 진실을 보고, 진실을 사랑하고, 알고 있다 라는 의미이다. 나는 모든 사람, 사물에서 하느님을 본다.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본다.
  나의 눈은 하느님의 완벽성, 영광, 美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이 나의 눈을 통해서 그의 완벽한 사상과 완전성을 보는 것이다. 나의 눈은 나의 영혼의 창이고 그것은 순결하고 항상 사랑, 진리, 美로 향해 일치되어 있다. 조화롭고, 활기차고, 힘있고, 치유하는 성스러운 靈의 힘이 나의 눈의 원자, 세포, 신경, 조직, 근육에 가득 차고 그들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고 있다. 하느님의 완벽한 규범이 지금 나의 눈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모든 원자와 세포는 하느님의 완벽한 규범에 순응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녀는 정신적인 삼투압 과정에 의해서 이런 진리를 그녀 마음 깊이 곳으로 옮기고 점차 완벽한 치유가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에 대해서도 기도함으로써 그와 완벽하게 협력했다. 몇 달 후에 그녀는 더 이상 안약이 필요 없게되었다. 눈의 모든 긴장은 사라졌다고 그녀의 의사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래와 같은 단순한 기도에 의해서 기적적인 치유를 가진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정신적으로 보고, 지적으로 보고, 육체적으로 본다. 이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그들은 기도할 때 그들의 영혼( 주관적 본성)에 놀라운 일이 발생할 거라는 예감으로 채우면 그것은 일어난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 바울이 사용했던 치유의 원리가 당신이 이용하고 있는 치유의 원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다. 우리의 사고의 틀이 혼란에 빠질 때는, 우리는 아프게 된다.
  우리의 어둡고 우울한 사고는 우리의 하느님의 빛을 가리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스스로를 영원하고 정신적인 가치에 일치 시킴으로써 사고의 틀의 재조정이 발생하고 이 바꿔진 지적태도에 순응하는 우리 신체 안에서 분자의 변화가 뒤 따른다. 치유는 뒤 따르고 눈의 치유는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귀머거리라도 다시 그 누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자신의 소리를 그의 귀로써 듣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하느님이 그 자신의 눈으로써 그 자신의 완벽한 생각을 보는 것이다.
  녹내장이 치유된 이 여인 물론 다시는 재발이 없었다. 그 치유는 영원한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이 치유를 가져온다. 그러나 가끔 이것은 영원하지 않고 오류가 있다.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과 그의 완전성에 맞추면 당신의 치유력은 더욱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다. 당신이 하느님과 조용히 대화하고 땅을 걷게 될 때 당신은 하느님의 존재를 실증시키고 심지어 당신이 의식하지 않을 때도 하느님의 치유력이 해방되고 항상 활동하게 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 눈과 함께 보는 것은 아니다. 눈의 각막은 외부 물체의 진동을 받고 시신경을 통해서 이런 진동들을 뇌로 전달한다. 내부의 빛과 지성이 외부의 빛과 만날 때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 내부의 보는 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있다. 무한한 지성이 우리의 의식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게 된다. 당신의 눈이 완벽하게 기능하지 않더라도 눈을 만든 치유의 원리는 손상 받는 것은 아니다. 당신 눈을 만든 그는 또한 눈을 재 창조, 재 조정 그리고 눈을 치유할 수 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했다. 당신의 눈은 하느님의 사랑, 모든 일에서의 하느님의 빛을 상징한다. 당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과 파장을 맞출 때 당신은 항상 좋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오른쪽 눈은 옳은 생각과 행동을 상징한다. 왼쪽 눈은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상징한다. 옳게 생각하고 선의를 내 뿜어라 그러면 당신은 완전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당신은 시력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은 모든 善의 원천을 인식함으로써 어떤 문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해답을 받을 수 있다.
  내부에 계신 하느님에게 최고의 충성을 바치고 당신이 기도하는 것의 실체를 느껴라.
  어떤 문제점과 함께 하느님에게 갈 필요가 없다. 당신은 받기 위해서 마음을 개방하고 그 해답을 지금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하느님으로 가는 것이다.
  그는 즉시 볼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를 따랐다.
 

8장

청력이 회복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 뜨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만해 두어라" 하고 말리시며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Luke 22:50-51)
  많은 사람들이 아프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고 어떤 곤란한 상태에 있는 자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나에게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보통 이야기한다. 위 성서 구절을 보면 그 종은 예수님에게 그의 귀를 회복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고쳐 주셨다.
  어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도 좋다. 하루 한번 정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조화, 건강, 평화, 기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다. 대통령, 의회,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당신 가정 그리고 인류는 축복받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봉사적인 헌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이와같은 질문을 받는다. "저의 어머님은 하느님의 치유력과 정신적, 지적 법칙에 대해서 반발합니다.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해도 효과가 있을까요?" 답변은 단순하다.
  만약, 당신의 부모님이나 친척이 당신의 종교적 확신에 대한 믿음이 없고 당신 기도의 특별한 기술과 과정을 믿지 않더라도 어째든 차이는 없다. 당신이 어떤 이를 위해 기도할 때 그가 믿던가 안 믿던가 혹은 받아 들이나 거부하는 가에 대해서는 신경써서는 안된다.
  당신은 그의 종파나 무신론에 대해서도 신경써서는 안된다.
  게다가, 그의 병의 증상, 일탈, 정신적 갈등이나 어떤 종류의 제약에 대해서는 당신의 주의를 주워서는 안된다. 당신은 注意를 고요히하고 감각으로 표착된 외부상황을 지적으로 거절하면서 당신의 고요한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단호하고 결의있게 수행해야한다. 무한한 치유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그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을 감싼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 진리를 긍정하거나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언어도 사용할 필요없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 즉 조화, 건강, 힘, 평화, 질서 그리고 신의 완전성이 지금 당신 친구의 마음과 신체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 속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당신은 당신 친구와 하나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과 일치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들은 마치 공기처럼 섞여있고, 각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당신 친구에 대해서 당신이 사실이라고 느끼고 아는 것은 그 친구 경험 속에서 되살아 난다. 건강에 대한 그 친구의 요청이나 소망을 당신이 받아 들이고 당신의 소망으로 만들 수 있다. 하느님의 특성과 속성을 명상하고 이러한 특질이 지금 당신 친구에 의해서 경험되어 진다는 것을 앎음으로써 당신 친구의 지적 구조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있고 그의 마음의 재조정이 일어나고 완벽한 치유를 불러 일으킨다.
  건강과 조화의 법칙인 당신의 내적 평화와 확신감이 지금 활동하고 당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기도를 하루 2-3번씩 계속함으로써 기도하고 싶은 모든 열망이 없어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당신은 갈망할 수 없다. 완전히 치유된 환자를 의사는 치료할 수 없다. 환자는 더 이상 치료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는 이와 똑같은 원리를 작용한다. 당신은 더 이상 기도할 필요 없을 때 까지 기도해야한다. 우리는 마음으로써 듣고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온 우리는 귀를 자른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잘못된 믿음과 테러 그리고 미신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혼란된 목소리를 듣는 것을 멈출 때를 말한다. 예수님은 귀를 만지시고 고쳐 주셨다.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는 진리의 소리 즉 나 자신이 하느님이고 나이외 神은 없다 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는 것을 오직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어라, 당신이 주의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잡담, 비평,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 당신은 진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가 당신에게 당신이 하는 일에서 실패할 거라고 말하고 당신이 그에게 어떤 주의를 주었다면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좋은 소식이나 복음을 듣고 있지 않다. 당신 안에 들어가서 당신의 모든 주의를 성공에 대한 생각에 두어라.
  당신은 즉시 성공의 느낌과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좋은 소식을 듣고 있다. 당신은 좋은 마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성공, 성취의 사고에 몰두하고 집중되어 있고 매혹되어 있다. 두려움과 성공은 단순히 마음 속의 2개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라. 당신은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 두려움은 잘못된 것이고 이것은 환상이고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에는 힘이 없고 실체도 없다. 성공에 대한 생각은 실제적이고 당신의 잠재의식의 힘은 당신을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당신의 주의를 성공의 생각으로 줄 때 마음의 법칙에 의해서 당신은 그 성공을 완수하려는데 필요한 과정을 강제적으로 단계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진리를 듣고 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축복하는 것은 항상 옳다.
  다른 이를 위해서 건강, 조화, 기쁨, 평화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富를 기원하는 것은 분명히 좋다. "그가 요청하지고 않았는데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까?" 이렇게 말한 자에 대한 대답은 "물론 아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원하는 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원해야한다. 사랑은 법칙의 이행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광휘(光輝)의 빛나는 빛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진리이다. 이것은 평화, 행복, 실행을 가져오는 법칙이고 당신 삶에서의 富인 것이다. 다른 이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他人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마음과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영혼 안에 있다. 그것 안에는 분열과 분쟁은 없다. 어떤 부분은 다른 어떤 부분과 적대적일 수 없다. 만약 적대적이라면 거기에는 조화는 없고 오직 혼란이 있을 뿐이다. 無限은 분리될 수 없다. 예를들어 만약 당신이 자신의 번영에 대해서 기도하고 다른 이의 富에 대해서 분개하면 당신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고 당신의 이익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 다른 사람의 부에 대해서 분개하면서 어떻게 당신에게 부를 끌어 당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당신은 부 대신에 빈곤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데로 그대로 당신에게 이루어 진다. 사고는 의식을 만들고 당신의 의식의 상태가 당신이 세계를 지배한다. 당신이 이 진리를 알 때 당신은 예수님이 된다, 즉 예수님(계몽된 이성, 진리의 인식)이 귀를 만지시다(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를 듣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 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의 상태나 당신 마음의 일치를 가져온다.
  그는 오른쪽 귀를 잘랐다. 여기서 오른쪽은 객관적 세계, 세속적 견해 감각으로 인식하는 증후, 외부 상황에 따르는 판단을 말한다. 오른쪽 귀를 지금 당장 잘라라, 그리고 외부현상에 힘을 주어서는 안된다. 세균, 병균을 경배하거나 그들에게 힘을 주어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무릎 꿇어서는 안된다. 어떤이가 콧물을 흘리면서 "아이고! 나는 감기에 걸릴 것이다."라고 말할 때 놀라서 움추려 들지 말라.
  선풍기가 당신 목을 뻣뻣하게 한다거나 차가운 밤 공기가 당신에게 폐렴이나 기관지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거절하라. 날씨는 당신을 제압할 힘이 없다. 우리가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라고 믿고 그것에게 힘을 주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 그대로 겪게된다. 선풍기는 해롭지 않다. 그것은 "나는 당신에게 감기를 주겠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가까이 와 앉으면"하고 말하지 않는다. 선풍기는 중립적이다. 이것은 금속물질로써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분자로 구성된 물체이다. 선풍기를 축복하라. 날씨를 축복하라. 하느님은 모든 사물은 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신 발이 젖어 있을 때 그 물이 폐렴을 일으킬 수 있다 라고 말하지 말라. 물은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말하나? 인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잘못된 神들을 만들었다. 그의 모든 곤란은 그의 어두운 마음과 뒤틀린 상상 속에서 일어난다. 영국인 Nicoll은 모든 인간의 惡은 틀린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그의 마음 속의 어스름한 빛 때문에 어두운 유리를 통해서 사물을 본다. 가끔 저녁 무렵에 인간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그의 적이 그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는 공포로 얼어 붙는다. 이것은 그의 마음 속의 어스푸레한 빛이다. 그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예수님이 되어라 진리에 대해서 깨닫고 오직 하나의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 의식이다, 다른 것을 원인으로 만들지 말라.
  당신이 "나는"이라고 하는 말이 유일한 힘이고 유일한 원인, 유일한 실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당신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잘못된 神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당신 마음 속으로 하느님의 노래를 부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당신의 귀는 이해를 상징한다.
  내가 행한 강연에서 저자 강연을 그들의 귀병 때문에 들을 수 없다고 불평한 사람들이 지금은 강단 홀의 뒤에 앉아서 완벽하게 경청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흥미는 일어났고 그들의 주의는 생명을 부여받고 깊은 마음으로부터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로의 응답을 받는다. 여러종류의 귓병을 앓고 있는 자에게 나는 아래와 같이 단순한 기도를 준다.
  "나는 진리를 듣고, 사랑하고, 알고 있다. 나의 귀는 하느님의 완벽한 사고로 인해서 만들어졌고 항상 완벽하게 기능한다. 나의 귀는 하느님의 조화가 나에게 드러내게 하는 완전한 기구이다. 하느님의 사랑, 美, 조화가 나의 귀를 통해서 흐른다. 나는 무한한 존재와 파장을 맞추고 있다. 나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작고 잔잔한 목소리를 듣는다.
  치유의 존재는 나의 청취력을 되 살아나게 하고 나의 귀는 개방되어 있고 자유로운 상태이다. " 많은 사람들을 상담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부분적으로 귀가 먹던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다. 그들은 어떤 사물과 격리 되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잔소리가 많은 부인을 가진 남자는 그는 그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따라서 점차 그의 청취력은 잃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자기암시는 그의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고 부여받은 암시를 따르는 과정이 일어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최면상태에 두고 그에게 그가 들을 수 있다고 말할 때까지 들을 수 없다고 암시하면, 암시에 순응적인 잠재의식은 이 암시를 받아 들이고 그는 그렇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 우리 마음 속에서의 우리의 주의를 주는 것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와 판단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진리와 자신을 격리시킨다. 그들은 말하길 "나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저 남자를 나와 떨어지게 하라.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목소리를 혐오한다. 나는 그것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을 듣지 않겠다." 등등 강조와 느낌을 가지고 이러한 말을 하면 그것들은 매우 파괴적인 것이 된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이러한 말들을 요청으로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의 경험 속으로 나타내게 한다. 당신은 위대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오래된 격언을 들어 봤을 것이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있어도 귀머거리는 없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플랜더스 던바 박사는 많은 경우에 귀가 머는 현상은 지적, 감정적 혼란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책 감정과 신체적 변화 에서, 그녀는 45세 남자가 결혼한 지 20년 되었고 보청기를 사용해야 했던 남자의 사례를 인용했다. 그 환자는 그의 귓병을 수영 탓으로 돌렸다. 그 환자는 귀가 멀게 되는 결과로써 하나의 좋은 점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였다. 의사는 그의 보청기를 검사했고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들은 재미있는 화제의 대화를 나누었고 3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의사가 여전히 그의 보청기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 이제 물론 당신은 그의 청취력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추론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잠재의식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욕구에 응답한 것이다. 들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이 모든 사고 즉 자신들의 모든 사고에 밀접한 관계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양보심이 없고 꽉 막혔고, 독단적이고 자만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당신의 귀와 모든 것을 만들었던 하느님의 지성을 신뢰하라.
  나는 당신의 건강이 회복되고 당신 상처를 고치기 위해서 하느님에게 요청하겠다.

9장

모든 業을 없애는 기도
  마가, 마태 복음과 같은 기적적인 치유를 기록한 루가 복음을 끝마쳤다. 요한복음은 성서에서 가장 신비적이다. 9장은 선천적 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그 부모의 죄 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그의 이웃들과 그가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가?"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John 9:1-9)
  당신은 나의 책 "당신 안에 있는 평화"(Peace within yourself)에서 더욱 광범위한 사건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그 책은 요한복음의 심리적 의미를 준다.
  옛날에는 선천적 장님은 과거의 業 때문이고 그는 여기서 그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또한 부모의 죄는 그의 자식에게 까지도 전달 된다고 믿었다. 예를들면 만약 부모가 정신병 환자이면 그들의 아이들도 정신병에 걸릴 것이라고 믿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부모의 지적태도, 분위기, 느낌을 말한다. 모든 죄는 신체의 움직임 보다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말해진다.
  부모는 그들의 습관적 사고, 공포, 긴장, 잘못된 믿음을 신체가 아닌 마음을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의 느낌과 분위기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아이가 생길 수 있는 창조적인 행위시 당신은 어떤 상태를 가지고 있나?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의식의 상태를 통해서 장님과 귀머거리는 태어난다.
  부모에 의해서 영향 받은 품격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것이 산출된다. 즉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 성서에서는 치유 받기를 거부당하는 사람의 사례는 없다. 절대적인 것은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그 아들에게 주여진다. 모든 판단은 우리 마음 속에서 선언되어진다. 각각의 인간은 그 자신의 결심이나 결론에 도달하고 거기에는 법칙의 자동적인 반응이 있다. 만약 인간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반응은 부정적이다. 만약 그가 긍정적, 건설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마음의 법칙의 반응은 좋고 매우 좋게 나타난다.
  자연과 우리의 마음의 법칙은 우리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에게 맞는 법칙과 90세 노인에게 맞는 법칙이 따로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그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이익을 요구하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그의 요구를 마음 속으로 밀어 넣을 때 그의 이익의 지적수용을 존중하는 응답의 법칙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과거는 잊혀지고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전생에 사람들을 눈멀게 했고 과거의 죄 때문에 현세에서 그 죄 값을 받고 고통받는다는 이런 널리 퍼진 미신적인 믿음을 거부하라. 또 다른 대중적인 미신은 선척적 장님은 그의 부모가 장님이거나 그들의 죄를 지었다던가 어떤 육체적 질병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비록 선천적 장님이나 사고로 장님이 되더라도 정상적 시야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어머니가 임신 중에 기도를 통해서 그녀 아이의 지적, 육체적 상태를 바꿀 수 있고 완벽한 치유를 가져 올 수 있다. 하느님의 눈 안에서는 장님, 귀머거리, 절름발이 같은 사람은 없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완벽한 존재로 보고 그의 창조물을 절대 완벽한 것으로 본다. 낮 동안 나는 나를 보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해야한다.
  이 말의 의미는 진리의 빛이 비추는 동안 우리는 의식적으로 법칙을 다룬다 라는 의미이다. 침을 밷아 흙을 이겨서 이것의 의미는 마치 어린 아이가 캔디가 먹고 싶어서 입에 침을 흐르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기쁨에 찬 상태를 나타낸다. 당신은 건헐온천에서 진흙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솟아 오르는 것을 봤을 것이다. 자연상태에서의 진흙은 자신 안에 있는 치유의 원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그는 다시 말해서 그의 내적 잠재력에 대해서 감각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가 내부에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서 깨닫고 열광적이게 될 때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 의미는 "그는 침으로 흙을 개어서 진흙을 만들었다."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과거의 제한된 상태, 암흑의 상태를 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의식상태를 지금 가졌다는 내적 확신이고 훌륭하고, 독특하고 비유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죄나 실수를 보상하거나 그 때문에 고통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사랑받기 위해서 또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오늘이 해방의 날이고 하느님의 왕국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당신도 눈 깜박이는 순간에 변화될 수 있다. 하느님에게 진실한 것은 인간에게도 진실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느님은 눈이 멀거나 귀가 먹거나, 벙어리가 되거나 아프거나 하지 않는다.
  人間에 대한 진리는 살아 있는 全能의 靈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모든 축복, 완전성, 기쁨, 완벽성, 조화 그리고 평화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들은 모든 대단하고 훌륭한 것들이다.
  이 끝없는 지혜에는 어떤 분쟁이나 분리는 없다. 당신의 마음을 하느님에 대한 영원한 진리에 두고 그것들을 지적 정신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할 때, 생각의 틀의 재조정이 당신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하느님의 완벽성과 완전성이 표현되어 질 것이다.
  여기서 흙은 곤란하고, 마르고, 잘못된 믿음이다. 흙투성이고 혼란스런 마음은 제거되어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라 의 의미는 버리고 멀리 보내라는 말이다.
  앞을 못본 상태는 또한 우리를 축복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이 그의 구원자는 그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욕구를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때 그는 진실된 의미로서 앞을 못 보는 장님인 것이다.
  이 장에서 선천적 장님에 대해서 다루고 있듯이 모든 인간은 장님인 채 태어 났을지 모른다. 많은 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환경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하고 구별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힘과 존재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다. 매일 보는 신문에서 당신은 정부에 대해서 과장되게 묘사된 시사풍자 만화를 볼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하나의 비유적인 그림이라는 것을 안다. 성서에 나오는 말은 비유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에서 나온 절름발이, 장님, 불구자에 대해서 오직 육체적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비록 귀나 눈이 손상 당하거나 질병이 없어도 들을 수 없거나, 내적으로는 장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새로운 일을 떠앉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불구자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그들은 발전을 거부한다. 그들은 실패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완벽하더라도 이것은 불구인 것이다. 그들은 실패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영국인 Nicoll 박사는 육체적 감각의 면에서 감정적 지적인 면으로의 변화하는 것은 믿음의 실행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걷는 것이지 시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2 Cor 5:7
많은 사람은 눈으로써 걷는다. 즉 모든 것의 문자적 의미가 그들의 의식을 다스린다. 앞을 못보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떠들지 말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신 다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이 말에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은 곧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따랐다.
(Matt 20:30-34)
  여기서 2명의 소경은 지상 위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 그는 지성적, 감정적으로 앞을 못 보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의식과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고 2가지 기능이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마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 좋은 사고를 선택하지 못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에 명상하는 것을 실패하면 우리의 지성은 앞 못 보는 소경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관적 자아의 힘과 지성, 지혜를 끌어내고 실현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내부에 있는 하느님의 제국에 관해서는 눈이 먼 상태인 것이다.
  앞 못 보는 소경은 고된 일을 해야한 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富는 단순히 의식의 상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는 혼란스럽고, 짜증나고 화가난다.
  富에 대한 느낌이 富를 만들어낸다. 건강에 대한 느낌이 건강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영원한 원천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을 이것과 정신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富, 健康, 平和,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모든 축복된 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젊은 여배우는 매주 몇시간 일하고 주당 천 달러를 받는다. 그녀보다 더 예쁘고 더 매력적이고 교육도 더 많이 받은 여배우들은 보잘 것 없는 배역을 받고 주당 100달러나 150달러 정도 받는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평가절하하고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우리 삶을 하루 1페니로 계약하면, 그 액수 만큼만 받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만약 그들이 그들에 대한 평가를 극복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요구하면 자동적 응답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당신의 믿음에 따라 당신에게 그대로 되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에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판매영업 사원이 되기 위해서 이 도시를 떠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몇 달 동안에는 그는 작은 봉급을 받았다. 실적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였다. 그의 눈은 우리의 최근 강연인 요한복음의 내적의미를 듣고 떠졌다.
그는 아내로부터 놀라운 진급을 축하받는 것을 상상했다. 그의 잠재의식에 완전히 인식될 때까지 이 상상을 계속했고 그의 승진은 객관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의식과 잠재의식의 조화로운 결합을 가져왔고 따라서 그 안의 2개의 암흑상태는 빛을 보게 되었다. 진급에 대하여 일치되고 동조하는 2가지 면인 것, 즉 그가 주관적으로 사실이라고 느낀 것은 객관적으로 실현되게 되었다. 주님 앞을 보고 싶습니다. 라는 것은 세상의 외침이다. 예수님은 당신 내부에 있는 정신적 힘에 대한 인식과 당신은 그것을 이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곤란이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당신의 깨달음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라고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만질 때 당신은 그것에 대한 인식, 느낌을 알게된다. 말하자면 당신은 접촉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사고와 지적인 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존재나 정신적인 힘과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의 의미는 반응의 본성을 가진 당신 안에 있는 영혼으로부터 즉각적 응답을 가지게 될거 라는 말이다.
  당신은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신은 당신 내부에 있는 정신적 힘을 지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것의 본성을 이해하고 이것에 당신의 유일한 헌신과 충성을 주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눈을 만들었던 제조자는 당신 눈을 고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 옆을 항상 지나가고 계신다. 당신의 욕구가 당신의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고 욕구의 형태로 나타난 구원자를 가지고 있다.
  욕구는 지금 당신의 마음의 거리를 걷고 있다. 당신의 소망에 도전하고, 당신의 전념을 다한 헌신을 분리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공포, 의심과 걱정 등이 있다.
  이것들은 성서에서 나온 비유에 따르면 소경을 그 상태로 붙잡고 있는 대중적 마음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를 더 높였다. 이것의 의미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 사고의 잡동사니를 힘차고 결단력 있게 뚫고 나아 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은 그것들을 옆으로 제쳐 놓고 오직 당신의 구원자인 당신의 욕구에 눈을 맞추어야한다. 당신의 욕구를 높이 올리고, 이것을 사랑하고 이것에 충성을 다하고 이것을 애정있게 입 맞추고 이것이 당신을 매혹시키게 하라. 당신은 지금 성실하고 치유의 존재에게로 접촉하는 것에 성공할 것이다. 당신이 그것과 접촉하는 순간 당신이 만든 통로를 통해 무한한 치유의 존재는 흐르게 되고 당신의 기도는 응답 받는다. 우리는 더 많은 빛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우리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오 하느님, 빛을 볼 수 있게 내 눈을 뜨게 해주소서." 하느님의 빛은 과거에도 항상 있었고 현재도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놀랍고 훌륭한 것이다.

10장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걷다.
  얼마 뒤에 유대인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예루살렘 양의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짜타 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 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 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들고 걸어 가거라" 하셨다.
John 5:1-8
  인류는 연못 안에 있다. 이 연못은 의식이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사고, 느낌, 믿음, 견해 그리고 지적인 상과 더블어 살고 있다. 이런 것들의 일부는 앞 못 보는 소경이거나 절룩거리거나 움추려 들거나 절름발이 상태이다. 게다가 인간은 결코 빛을 본 적이 없는 꿈, 희망, 포부로 가득 차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불행하고 몸이 아프다. 그들은 그들의 꿈, 이상, 계획, 의도를 실현시키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소경, 절름발이, 중풍 등의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 의미는 죽은 희망과 꿈을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지 말라. 당신은 시작해야 하고 당신이 시작할 때 전능의 힘이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주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든 힘, 자질과 특성은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이 그것들을 불러내고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이익을 수천배로 확장시키고 증가시켜서 나타나게 하라. 주도권은 당신에게 있다. 내부의 하느님이 지금 심장을 규칙적으로 뛰게하고 혈액순환을 하게하고 당신의 신체의 모든 기관을 다루고 있다. 지구, 별들, 태양, 그리고 달 그리고 모든 세상은 당신이 즐기기 위해서 여기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현재의 당신을 높이려고 한다면 당신은 필요한 단계를 밟아야한다. 지금부터 건설적으로 생각하고 당신 내부에 있는 앞 못 보고 귀머거리 그리고 움추려든 상태를 고쳐야한다.
  이 치유의 드라마에서 기도는 연회로 불리운다. 당신의 이익에 대해서 명상할 때 당신은 연회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의식적으로 결합할 때 마치 한 조각의 빵이 당신 얼굴 위의 털이나 당신 신체의 살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당신의 살아있는 부분이 된다. 그 연못은 다섯 개의 현각을 가지고 있었다. 의 의미는 우리는 오감각(五感覺)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보통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부정한다. 게다가 우리의 오감각(五感覺)은 우리에게 헛소문, 잘못된 믿음과 제한 등을 심는다.
  당신은 이 치유의 드라마의 가르침을 적용시킬 수 있다. 내부의 정신적 힘이 전능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당신은 예수님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마음을 고요히하고 당신 안에 있는 살아있는 전능의 靈에 주의를 집중할 때 당신은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하느님 안의 완전한 침착, 고요의 상태인 神적 中心으로 들어왔다.
당신은 하느님의 평화, 깊은 평화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당신은 걱정과 공포의 분위기를 믿음과 확신의 분위기와 내적평화로 바꾸었다. 이것이 성서에서 양 시장을 언급한 이유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에서 매 순간 시장 안에 있다. 당신은 끊임없이 사고를 교체하고 다른 사고를 취하기 위해 현재 사고를 버린다. 당신은 공포를 버리고 하느님과 그의 법칙에 관한 믿음을 사야한다. 사악한 의도를 버리고 빛나는 선의를 사야한다.
  당신의 믿음에서 앞 못 보는 암흑의 상태는 버리고 어떤 문제라도 돌출구가 있다는 생각을 사라. 하느님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명상하라 그러면 당신은 해답을 알게 된다. 천사가 물결을 일으키다 여기서 천사란 당신의 욕구, 소망이다. 치유의 기적이란 나의 강연에서 어떤 사나이가 나에게 그에게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을 말했다. 그는 매우 힘들어 했고, 그는 神적 조정을 갈망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가져 오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는 어떻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배웠다. 누구든지 먼저 들어간 자는 치유를 받았다. 아무도 그 앞에 끼여 들어 올 수 없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성스러운 존재 안에 항상 있고 실제로 아무도 그를 강탈하거나 사기칠 수 없다는 진리를 인식했다. 하느님과 하나됨으로써 그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을 때 그는 無限한 존재와 결합을 깨달았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이제는 질서, 조화, 선의, 사랑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완벽한 완전성으로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말로해서, 이 젊은 남자는 외부세계를 혼란과 무질서로 보는 것을 멈추고 그는 그 자신 안으로 가서 내부의 조화와 神적 조정을 요구했다.
  더럽고 혼란스러운 외부의 그림은 하느님의 질서와 그들 사이의 평화로 변했다. 괄목할 만한 해결책이 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방법을 아는 하느님의 지혜에 신뢰하라. 우리의 목표를 형성시키는 신성이 있다. 내가 막 끝냈던 욥기에 대한 강연 중 하나에서 나는 그 참석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어떤 문제가 있고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그날 밤에 조용히 앉아서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과 그 상황 안에 하느님과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안의 하느님을 조용히 인식하라고 말했다.
  이 진리에 대해서 조용히 명상한 후 그들은 주관적 자아가 모든 것을 좋게 되도록 명령한 사실을 알면서 그 문제를 완전히 주관적 자아로 떠 넘긴다.
  이 과정은 내부 훈훈함과 따뜻함을 가져오는 마음 속의 불을 지피고 이 사랑의 불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동안에 잠들어야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놀라운 해결책을 받았다. 아무도 당신 앞에 끼여 들어 올 수 없다. 아무도 당신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당신이 인식하는 유일한 힘은 당신 자신의 생각인 것이다. 당신이 생각할 때 그 과정은 실제로 행동의 무한한 힘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 당신 자신의 생각이 하느님의 무한한 힘을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유일한 무한한 존재의 행동을 반대하고 도전, 위협하는 것은 없다. 전능의 힘이 2개일 수 없다. 만약 2개라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행동을 취소하거나 중화시키게 될 것이고 어디에도 질서는 없다. 2개의 무한함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고 수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무한함은 트라워드 가 말했듯이 통일, 하나로 일치. 완전성으로 움직인다.
  당신의 마음도 또한 통일, 당신의 이상과 하나로 일치로 움직여야 한다.
  어떤 다른 힘을 인정함으로써 당신의 마음은 갈라진다. 따라서 당신은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병사와 같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막 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두 개의 생각이나 생각들이 싸우면 당신 마음은 분열된다. 당신은 조정자가 되어야하고 오직 하나의 힘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해야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포로부터 행방된다. 두려움 없는 욕구는 실현된다. 다른 사람들의 암시, 대중적 마음과 대중적인 공포는 당신을 압도할 힘이 없다. 외부의 조건과 다른 사람들의 암시는 원인이 아니다. 당신의 사고는 통제 안에 있어야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는 화나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부정적으로 당신 사고를 움직이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지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그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식이나 당신의 통상적 사고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이 없다. 당신이 하느님을 생각할 때 당신은 그 전능의 힘과 하나가 된다. 원천은 사랑이다. 이것은 두려움을 모른다.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이와같은 말을 한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존의 잘못이다. 메리나 자니만 없었다면 나는 승진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와같이 말하면 당신의 헌신은 분열되고 당신은 다른 것은 알지 못하는 하나의 힘에 대해서 불신하는 것이다.
나는 神이고 나이외 神은 없다.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나는' 이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말은 첫 번째 사람, 현재시제인 것이다. 이것은 원인과 창조자로서 내부의 하느님의 존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누이나 아들에게 말할 때 "당신은"이라는 말을 주의 깊게 보아라. 당신이 제 삼자를 말할 때 "그들은" 또는 "그녀는" 등등 이라한다. 요한복음에 대한 강연에 참석하는 어떤 여인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는'이라는 말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내 대신 그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나는이란 말은 내가 되고자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그와같은 정신적 분위기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 장소, 사물도 내 앞에 끼여 들어 올 수 없고 내가 되고자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에 따라 나에게 그대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와같은 놀라운 것을 표현하는 기도를 사용했다. 병자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그것은 그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38년의 숫자적 상징이나 성서의 과학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정신적 세월의 흐름을 의미한다. 30의 숫자는 삼위일체나 우리 자신 마음의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8의 의미는 8음계나 지적, 정신적 법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높이 오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 삼위일체는 당신의 사고와 느낌 그리고 이것들의 융합에 의해서 하느님과 당신의 이익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되는 세 번째 단계이다. 느낌이나 감정에 의해서 당신의 사고가 만들어질 때 두 개는 하나가 되고 당신은 평화롭고 또한,하느님은 평화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삼위일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오스펜스키는 중간에 들어 가는 것을 3번째 요소라고 부르곤했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당신의 치유의 원리가 당신의 모든 부분을 하느님의 완전한 규범인 조화, 건강, 평화로 개조시킨다고 지금 요구하고 느끼고 믿으면 완전한 건강의 생각이 되살아날 수 있다. 몇 년 전에 나는 노틸러스 라는 잡지에서 놀라운 기사를 읽었다. 인디아나폴리스에 있는 프레데릭 엘리아스 앤드류에 의해서 씌여졌다. 어떤 소년의 병이 불치라고 여겨졌다. 무릎과 손이 굽고, 뒤틀리고, 절룩거리는 상태가 그 소년은 기도를 시작함으로써 그는 강하고, 곧고, 잘 다듬어진 신체의 남자가 되었다.
  이 젊은 남자는 완벽한 치유를 갖기를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었고 그가 필요한 것이 지적으로 흡수되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나는 완전하고 완벽하고, 강하고, 힘있고, 사랑스럽고, 조화롭고 행복하다." 그는 끈기가 있었고 그의 기도는 잠을 자면서 되뇌이는 마지막 말이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의 말이였다. 사랑과 건강에 대한 사고를 보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이러한 기도의 방식과 마음의 태도는 그에게 몇 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옛날의 욥이 그의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 같이 하느님은 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2배를 주었다. 그의 믿음과 인내는 큰 이익을 가져왔다. 부정적 사고가 그에게 닥쳐도 그는 그것들을 오래 품고 있지 않았다. 공포, 분노, 질투, 걱정 같은 생각이 그의 마음 안에서 생기면 그는 그의 마음 속에서 그의 기도를 행하였다. 모든 두려움에 대한 대답은 당신 마음 속에서 영원히 타오르고 있는 사랑의 램프를 켜는 것이다.
  성서에 나온 남자는 38년 동안 앓아 왔다.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치유가 일어날 때는 8이라는 숫자가 더해진다. 8은 사고와 느낌 또는 의식과 잠재의식의 통일,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상징하는 2개의 원으로 구성된다. 당신의 욕구와 감정이 동의하고 일치될 때 둘 사이에는 더 이상 갈등이 없고 치유는 뒤따른다. 예수님이나 당신의 계몽된 이성에 의한 명령인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라 이것은 당신은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내적 확신을 기초를 둔 당신의 권위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믿음의 내적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진실한 내부의 명령이다. 당신은 당신의 침상(진리)를 들고 자유롭게 걷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은 안식일 날 일어났다. 안식일은 참된 기도에 의해서 발생된 내적 확신이나 내적 고요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걱정하지 않고 동요되지 않고 훼방받지 않은 마음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마치 아침에 태양이 떠 오르는 것을 확신하는 것 처럼 당신의 소망의 復活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완벽한 지적 수용성의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당신은 안식일이나 이것은 해결되었다는 내적확신 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안식일 날 그는 치유를 받았다.

11장

不可能이 可能하게 되다.
  치유의 기술의 하이라이트인 요한복음 11장의 라자루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이 장의 완벽하고 섬세한 번역의 나의 책 당신 안이 평화(Peace Within Yourself)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요한복음 각 장의 번역서이다. 라자루는 당신 내부에서 냉동된 상태로 살아난 적이 없는 소망, 계획, 목표, 그런 죽은 상태이고 당신의 경험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건강에 대한 당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이 실패했던 것을 말한다.
  라자루 무덤 앞의 예수님은 두려움, 공포, 의심, 걱정의 무덤 속에 오랫동안 묻혀지고 잠재의식 안의 무덤 안에서 억압받은 상태로 있는 당신의 이상을 되살릴 수 있는 힘에 대한 인식과 당신을 표현한다.
  돌을 치워라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신, 공포 그리고 무지의 돌은 제거되어야한다. 마르타, 이것은 세속적인 관점을 나타낸다. 벌써 악취가 납니다. 그가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습니다. 라고 당신에게 말한다. 여기서 숫자 4는 완료된 상황, 종국, 나타난 상태를 의미한다. 외부의 환경은 고려할 필요없이 비록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부정하더라도 만약 당신이 믿으면 당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감각(五感覺)으로부터 물러서고 내부로 들어가서 당신이 기도하는 것의 실체를 명상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 당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당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게 될 것이다. 믿는 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그 상태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당신의 사고는 당신의 믿음이고 당신이 생각하는데로 당신은 그대로 된다.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사고와 실체 속에서 살아라, 그러면 병든 신체가 새로운 지적 틀에 순응하는 원자적 분자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허약, 병마, 공포에 힘을 주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돌은 치워진다. 당신이 모든 힘을 하느님에게 드릴 때 돌은 제거되고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의 짐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당신의 새로운 지적태도가 공포와 잘못된 믿음의 돌을 멀리 굴러 버리는 천사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합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크게 외쳤다. (John 11:41-43)
  당신은 지금 이러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예수님인 것이다. 이런 구절은 기도에 대한 훌륭한 공식을 준다. 감사하는 마음의 태도는 기적을 일으킨다. 몇 년전 나의 친구는 결핵에 걸렸는데 그는 성서에서 나온 이런 훌륭한 언어를 기도로 사용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추론하여 생각했다. 그의 육친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약속하는 것을 주었다. 예전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랑스로 여행을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는 아일랜드에 산다.) 그 여행은 8월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5월달에 만들어 졌다. 그는 그 당시 얼마나 즐겁고 열광적이였던 가를 기억한다. 그는 그 당시 말할 수 없이 기대와 스릴로 마음이 부풀었던 가를 회상했다.
  그는 비록 여행은 떠나지 않았지만 이런 기분은 일어났다. 그가 그 당시 지녔던 감정은 약속 때문이였다. 그것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나는 완벽한 건강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드리지 못하는가. 하느님은 항상 내 청을 들어 주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그대 건강을 회복시키고 그대 병을 고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리라." 하루 2-3번 그는 마음을 고요히하고 편안히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 내부의 보이지 않는 치유의 존재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상상하고 "감사합니다."라고 계속 반복하면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마음이 감사의 느낌으로 완전히 적실 때까지 계속 했다.
  3주후에 타액검사와 다른 검사는 완전히 음성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느님의 주문을 자신에게 감싸게 했다. 그 자신에 의해서 경험되어지고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자신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조화와 완벽성을 사색함으로써 그는 매혹되었다. 그가 자신 내부에 계신 하느님의 평화, 질서, 치유력을 명상할 때 그의 신체의 원자의 완벽한 재조정이 있었다.
  그는 니켈이나 자력에 끌려오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철을 자신에게 끌어 당기는 자석이 되었다. 병든 상태에서는 그는 자력이 없어진 상태이고 원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는 조화, 건강 그리고 평화를 진동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감사하는 마음과 유일한 존재의 치유력에 대한 믿음은 마치 자석같이 그를 건강하고, 활기차고, 조화롭고 완전하게 되는 확신을 끌어 당긴다.
  여기서 언급한 남자같이 당신 승낙없이 다른 어떤 힘이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버려라. 당신이 원하고 있는 행복하고 건강하고 빛나고 강한 것에 대해서 명상하라. 이러한 것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외 다른 것은 받아 들이지 말라.
  소위 원인이나 힘으로 불리우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버려라. 모든 잘못된 믿음을 단호히 그리고 힘차게 거부하라. 당신의 느낌, 믿음, 신뢰에 따라 움직이는 내부의 최고의 힘을 믿어라. 당신이 이와같이 할 때 당신은 놀라운 지적, 정신적 자석이 되고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조화, 건강, 평화 그리고 기쁨을 끌어 당길 것이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3단계
  1 당신의 의식이 최고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식
  2 완벽한 건강에 대한 사고를 받아 들이고 마음 속에 그것을 품고 생활한다. 그런 사고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그런 사고들을 살아나게 한다는 것을 믿어라.
  3 앞의 두 단계를 뒤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확신, 당신은 지금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것이 되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의 분위기는 하나의 권위이고 당신 내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이것은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임을 알고 있는 사람의 내부로 부터의 명령이다.

12장

치유의 기도
  개인적 치유의 경험이 기도의 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 일 것이다. 약 35년 전에 나는 시편 139을 기초로 둔 기도에 의해서 나의 병을 고쳤다. 나는 시편의 번역을 들었고 그 진리의 심원함에 대해서 명상했다.
  야훼는 나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장엄하고 고무시키는 내용의 시편은 신체와 그의 기관은 그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고로써 존재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마치 시계 제조자가 시계가 객관적 실체로 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 속에는 그런 사고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처럼 창조의 지성은 모든 신체를 형성시키고 만들었다. 신체를 만드는 지성은 그것을 고치는 것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시편은 당신 책에 나의 됨됨이는 씌여져 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책은 모든 기관의 原型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원칙인 것이다.
  이 시편을 나의 기도의 기본으로 함으로써 나는 아래와 같이 매우 단순한 방식의 기도를 했다. "나의 신체는 은밀한 곳에서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그의 지혜는 나의 모든 기관, 조직, 근육, 뼈를 만들었다. 그의 치유력은 나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듬으로써 나의 마음과 신체를 가득 채운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하느님의 작업은 놀랍고 훌륭합니다." 나는 하루 5분 2-3회 큰 소리로 기도했다. 약 3달 후에 나의 피부는 완전하고 완벽해졌다. 하신 일의 놀라움; 그리고 나의 영혼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예전에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다시 문장을 하나 하나 점검해야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대로 적었습니다.)